중국에 와서 난감할 때가 간혹 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은 경우를 제외 하고서)

혼자 생활하지만 업무상 회식을 하거나 동료랑 어울려 먹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래도 대부분 식사는 집에서 직접 준비해 먹게 됩니다.

저는 국물이 있는 국을 좋아하기에 (그렇지만 국물보다는 건데기 위주로) 매 끼 마다

국을 준비합니다.  손쉬운 된장국, 콩나물국, 미역국, 김치국 그리고.....

언제부턴가 전화로 딸 아이는 칭찬 겸 농담으로 "세프"기 다 되었다고 놀리기도 합니다. 저야 농담으로 듣지만 딸 아이의 마음은 안스러움 반 그리고 칭찬반 이겠지요.

 

중국에서 난감한 것중의 하나가 중국식당은 혼자나 둘이서 시킬만한게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인지 영업사원들 얘기를 들어보면 고객 방문해서 식사 약속을 하면 기본으로 한테이블 (여덟명 이상)을 채우는데 자신들의 지인을 초대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그럴 경우 예의에 어굿난다고 생각하고 가자고 해도 거절하지만 여기에서는 거리낌없이 당연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실제 식사 주문을 할 경우 여덜병 정도가 되어야 주문 가짓수 구색을 맞출 수 았기에 이해가 됩니다. 

 

어제는 늦게 퇴근하다가 저녁 식사 전이어서 아파트 단지내에 있는 한국 식당인  해장국 집엘 들렸습니다.  식사를 주문해 놓고 술 생각이 나서 단지내 동료 한사람에게 전화를 했는데 마침 집이기는 하였지만 .... 반응이 미지근 했습니다. 그래서 혼자 마시기는 처량해서(?) 술은 마시지 않았습니다. 원래 저는 술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정말 반주삼아 마시는 정도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술에 대한 두가지 금기가 있습니다. 금기라 하니 이상하기는 하지만.... 그 두가지는 "혼자서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와 " 내게 안좋은 일이 있을 때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입니다.  지금까지 변함없이 지켜져 온 원칙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도 몇 가지 약술과 건강술(?)을 담그었다가 한잔도 못마시고 결국 중국에 들어올 때 지인들에게 모두 나눠주고 왔답니다.

 

식사 도중 내내 누군가가 그런 전화를 했으면 저라면 늦게라도 나섰거나 아니면 전화로 무슨 일 있느냐고 다시 묻고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길을 나설 것 같아서 "혹시나" 문을 열고 들어올까 하고 기다렸지만..... 그것은 제 생각이었습니다.

 

식사하는 도중 여러가지 생각들이 웬지 모를 처량함과 자책감이 스치면서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되돌아 보면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서.

 

그렇게 하루는 저물었습니다.  

 

의미는 달라도  정호승 시인의 "술 한잔"이라는 시를 옮겨 봅니다.

정호승 시인의 시집 "서울의 예수"를 오래 전 샀던 기억으로

 

 

                         <131116>

 

 

술 한잔

                  정호승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하여 단 한번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연꽃 소리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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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한글사랑(다향)

 

 


 

 

그 날 나는 누군가에게 미소 짓기만 해도

베푸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 후 세월이 흐르면서

따뜻한 말 한마디, 지지 의사표시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고마운 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야 안젤루, ‘나는 멋지고 아름답다’에서>

 

그렇지요.

내가 모르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낯선이의 얼굴에서 나를 향한 미소를 보았을 땐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고 나도 가볍게 미소를 보내곤 합니다.

 

어느 날엔 에리베이터를 탔는데 무뚝뚝한 얼굴을 만나면

나도 굳어지지만 애써 웃으면서 가볍게 목례를 하면 그도 금방 얼굴이 환해집니다.

 

아이들 어렸을 때 우리 가족은 회사 사택에 살았습니다.

공장이 다르고 부서가 다르다 보니 서로 얼굴은 모르지만

그래도 한 회사에 다니는 동료의 가족이기에 다른 곳과 달리

예리베이터를 타면 아이들이나 어른들 할 것 없이 가벼운 인사를 나누곤 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유달리 우리 아이들에게 인사성이 밝도록 교육을 했습니다.

멀뚱 멀뚱 서 있으면 억지로라도 인사를 시키곤 하다보니 

습관이 되었는지 서울에 와서도 아파트 단지에서 예의바른 착한 아이들로 소문이 났습니다.  어쩌다 에리베이터에서 아이들이랑 함께 타면 그 분들이 아이들의 인사를 받으면서 제게 아이들 칭찬을 하면 저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원래 어렸을 땐 인사를 잘하면 모든 게 용서될 시기이니까요.

물론 이 평범한 진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유효하답니다.

 

오늘 글 하나 보면서

나름 "미소도 선물의 하나"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작은 베품 하나가...

 

회사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휴지르 사용하는데

그 사용한 휴지로 세면대의 흘린 물기를 닦아내는 게 오랜 습관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말없는 제 모습을 본 중국 직원들이 아주 드물지만

저처럼 사용한 휴지로 세면대 물기를 닦아내는 모습을 보고 방긋 웃어주었습니다.

그도 나를 보면서 하얗게 웃었습니다.

 

마음이 흐뭇해지는 날입니다.

 

           <141114>

 

 

Posted by 한글사랑(다향)

 

 

중국 직원과 얘기하다가 내가 차를 좋아한다니까 자기 고향이 복건성이라면서 나눈 얘기..저도 새로이 알고 옆에 통역하던 그 회사 직원도 새롭게 알았답니다.

시작은 마카오 얘기가 아니라 근처 아는 공장에 대해서 얘기하다가 그 공장의 소재지가 마조만(媽祖彎)란 곳이라고 하기에 그 마조의 쯧이 무어냐고 물어보니 마카오까지 얘기가 진전되었습니다.  천진의 고문화 거리에 있는 천후궁도 같은 사당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마조는 태국까지 이어지는 중국 남부의 어부를 지켜주는 신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우리의 용왕신과 ㅂ다 할머니정도 ...

 

마카오의 유래

 

마카오는 지난 199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에 귀속되었지만, 1557년부터 적어도 4세기 이상의 기간 동안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남아 있었다. 그런 까닭에 중국문화와 포르투갈 문화가 공존하고 혼용된 곳이다. 사실 마카오는 중국본부와   멀리 떨어진 광동성의 동남부 해안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중원문화의 영향은 그리 크지 않다. 말하자면 중원문화의 변방이지만 바로 그 이유로 인해 동남부 해양문화 혹은 동남아문화의 특성이 강한 곳이기도 하다.

 

2.

마카오 기행은 지난 해 2월 21일에 한나절 정도 진행되었다. 여행 프로그램이 대부분 그렇듯이 별볼일 없다고 생각되는 곳은 그저 스쳐지나가듯 구경하는데 그친다. 마카오처럼 말이다. 하지만, 주의해서 보면 유적도 적지 않거니와 그 의미 또한 독특하다. 이 중에서 소개하고픈 것이 마조각이다.

 

마조각이란 마조(媽祖)를 모신 사당을 의미한다. 현지에 세워져있는 안내판에는 마각묘(媽閣廟)로 쓰여있다. 현지의 안내원에게 들으니, 마카오는 마각에서 유래한다고 하였다. 곧 마카오의 상징인 셈이다. 이 한 가지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속된 말로 본전을 뽑고도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이 사당을 부르는 이름 중의 또 하나는 천후궁(天后宮)이다. 이는 청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한 봉호이자 건물명이다.

 

마카오 사람들에 따르면 천후궁보다 마조묘라는 이름을 더 많이 사용한다고 한다. 관제(官製)의 엄숙하고 딱딱한 명칭보다 오랫동안 친숙하게 사용하던 이름을 선호하는 셈이다. 마조란 복건어로서 할머니를 뜻하기 때문이다.연구자들에 따르면 마조의 사당은 광동성과 복건성에 가장 많으며, 원래 광동성 광주부 향산현(오늘날의 중산시)의 일부였던 마카오에도 오래전부터 이 사당이 세워졌다고 한다.

 

이 마조각은 <안내문>에 따르면 명나라 홍치 원년(1488년) 혹은 만력 33년(1605)에 세워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이미 복건의 상인들이 이곳에왔던 성화연간(1465-1487) 혹은 천순 2년(1458)에 창립되었을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여하튼 마카오에서는 가장 오래된 마조 사당이다. 마조 사당이 대체로 원대와 명대에 많이 세워진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 사당도 그 초기의 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 위치는 마카오 반도 서쪽 끝의 내항 입구이다. 뒤로는 낮은 산이 있고, 앞으로는 좁은 바다가 펼쳐져 있는 곳으로 전통시대에 포구가 자리하기에 좋은 위치이다.

 

건물 배치는 전형적인 사당형식으로 정문, 패방, 정전, 홍인전, 관음각, 정림선림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들의 성격이 각각 유교적, 도교적, 그리고 불교적 특성을 내포한 것이므로, 마조각은 그 점에서 전형적인 삼교합일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건물들은 산 사면 아래쪽에 낮게 지어졌기 때문에 웅장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연 속에 묻혀 있는 느낌을 준다. 북경이나 남경과 같은 대도시의 사당들의 크기가 어마어마한 것과 비교된다.

 

3.

이제 우리에게도 조금씩 알려진 마조는 본래 송나라 때에 복건성의 미주(湄洲)라는  섬에서 태어난 역사적 인물이 신으로 승격된 전형적인 사례이다. 중국의 민간 사회에서는 대체로 그 지역사회에 공을 세운 인물이 사망하면 신으로 승격시켜 공동체의 수호신으로 삼아왔기 때문이다.

 

임묵랑이라는 이름의 이 여성은 태어날 때부터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살아 생전에 구름을 타고 바다를 건너는 초인적 영력을 가지고 지역민들을 재난과 불행으로부터 구해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선원들에게는 바다의 신으로, 상인들에게는 재물의 신으로, 또 수군에게는 전쟁신으로 모셔지게 되었다. 예컨대 원왕조는 동남아에 대한 해상 원정시 그녀의 보호를 받기 위해 마조를 ‘天妃’로 승격시켰다. 쿠빌라이 시대 때의 일이다. 민간신이 국가의 신으로 변신한 셈이지만 이 조치는 이미 송대에도 이루어졌다. 12세기 항주로 천도한 남송대에 송왕조가 남부의 안전을 위해 영혜부인(靈惠夫人)으로 봉하였다. 청의 순치 때에는 천상성모로, 건륭제 때에는 天后로 봉해졌다. 청조의 이런 조치는 광동 연안에서 활동하던 해적들을 제압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곧 마조-> 영해부인 ->천비 ->천상성모 ->천후로 승격되어 왔던 셈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복건지역의 연안무역상인들이 숭배하였던 해신으로 그 성격을 강화하였고, 이 때문에 포구가 있는 곳곳에 그의 사당이 세워졌다. 조선왕조 시대에도 인천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부 인터넷 정보, 예컨대 네이버의 지식백과에는 마조의 출생연도를 당나라 현종(685-762) 때라고 하였으나, 이는 오류이다.공인된 출생연도는 960년이다.)

 

[출처] [마카오여행] 마카오의 유래는 마조묘(媽祖廟)|작성자 옥가실

 

Posted by 한글사랑(다향)

 

오늘은 하루 종일 집안에 있았습니다.

춥고 으스스하고 머리는 질끈 질끈 아프고

새벽 시장에 가려고 일어 났다가 다시 눕고 말았습니다.

레지오 모임에도 못간다고 소식을 남기고 ...

 

아마도 누적되는 정신적 육체적 피로도 한 몫을 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회사의 경영 환경이 안좋다 보니 여러모로... ...

 

예전에는 이 보다도 더 어려운 환경을 이겨냈는데도

조금은 힘에 부치는 듯합니다.

나이 탓? ...

그래도 가장 큰 이유는 열정이 부족한 탓이겠죠.

 

아들이 많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녀석을 보면 꼭 껴안아 주고싶은데 ..

예전의 아버지가 힘들 때에 저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문득 그런 생각이듭니다.

....

 

엊그제 딸 아이가 수능릉 보았습니다.

전날엔가 전화를 걸었는데 녀석에게 할 수 있는 말이 딱히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너는 잘 볼 수 있어. 아빤 믿는다"는 말이 입 속에서 맴돌다 정작 나온 말은

 

"약간 긴장해도 돼. 

 떨려도 돼

 그리고 못 보면 어때...

 노력한 만큼 자신있게 보는거야"

 

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열심히 공부하다가 막판에 안심하고(?) 마음을 놓은 탓에 걱정이 되었는지

그 전 날 부터 잠을 못이루고 아침 식사에 점심까지 아내가 볼 때에도 긴장한 모습이 애처로울 정도로

아마 그건 스스로에 대한 믿음, 즉 자신감이 떨어진 걱정으로 인란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 녀석이 전날 저녁에 그리고 당일 새벽에 동생에게 전화해서 격려했다는 말을 듣고서 대견스러워졌습니다.

군대라는게 아무래도 '내부지향적'이다 보니 관심과 분출할 대상이 아무래도 집과 가족일 것입니다.

여자 친구도 싫다고 안사귄 아이니(실상을 보면 여자아이들이 그리 좋아할 생활 습관이 아니지만..ㅎㅎ)

 

인터넷에서 아래 글을 보았습니다.

작가 노희경은 내가 몇년 전에 소설로 만난 작가이기도 합니다.

관련된 내용을 조금은 이리 옮겨 봅니다.

 

          <131110>

 

 

진정으로 위로하는 법

<겨울, 바람이 분다>에서

출처: http://maummonthly.blog.me/40182296381

 

 

사람이 사람한테 해줄 수 있는 건 용서가 아니라 위로야.” 

      

오수(조인성)의 독백과도 같은 얘기 오영(송혜교)에게...

태생부터 쓰레기 같은 놈이지.”

그런 쓰레기 같은 놈을 사랑해서 집을 버리고 학교를 포기하고

자기 애까지 가진 여잘 책임지지 못한 건 용서할 수 없는 일이야.” 

 

그때 오수를 향한 오영의 한마디.

니가 뭔데 그 사람을 용서해? 사람이 사람한테 해줄 수 있는 건 용서가 아니라 위로야.”

 

~!!! 정말 명대사. 그리고 오영은 자신이 크토록 받고 싶었던 위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요.
6
살 뇌종양에 걸렸을 때 자신이 바란 것이 바로 위로였다고.

 

그런데 사람들은 오빠 너처럼 위로하지 않았어. 위로는커녕 6살 아이한테 용기를 강요했어. 잔인하게. 괜찮아 영이야. 수술은 안 무서울 거야. 괜찮아 넌 이길 수 있어.”

 

그럼 사람들이 그 말밖에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어?”

하는 오수(조인성)의 반문에 오영(송혜교 분)은 담담히 자신의 심정을 말하지요. 

 

안 괜찮아도 돼. 영이야 안 괜찮아 해도 돼. 무서워해도 돼, 울어도 돼.

만약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면 난 하루 이틀 울다가 괜찮아졌을 거야.

근데 그때 못 울어서 그런가 지금도 난 6살 그때만 생각하면 자꾸 눈물이 나.

그 사람도 나 같지 않았을까. 기억도 못할 나이에 나무 밑에 버려졌는데,

그것도 모자라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한 여잘 어린 19살에 영원히 잃어버렸는데

아무한테도 위로받지 못했잖아.”

 

그 말에 울컥하지만 그런 위로를 받을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오수(조인성)

그의 뿌리 깊은 죄책감을 표현하는 한마디를 말하지요.

그래도 아이를 책임지지 못한 건 잘못이야.”  

    

하지만 오영은 다시 그 사람을 위로하지요.

잘못이지 아주 큰 잘못. 하지만 그 사람은 자기도 책임질 수 없는 열아홉이었어.

그 나이에 자기 인생을 꼭 빼닮을 것 같은 아이는 많이 무서웠을 거야.” 

 

 

Posted by 한글사랑(다향)



사소함의 일상들
그 사소한 일들에 울고 웃는다.
.그리고 때로는 우리를 위로한다..

동감1

 

<1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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