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8. 29. 08:58 옮겨온 글
日本人에 대한 3가지 斷想 (조주청)
아래 내용 중
첫번째 친절함은 제가 일본에서 느꼇던 사항과 거의 유사합니다.
그 친절함에 .....저도.....
두번쩨도 공감합니다.
세번째 장면은 TV를 통해서 애도하는 모습을 보았는데...우리완 많이 달랐습니다ㅏ.
(인터뷰 내용을 보니 ...)
■ 日本人에 대한 3가지 斷想
하나.
28년 전, 일본에 처음 가서 가장 먼저 조우한 일본인은
오사카 지하철역 지하도 구석에 있는 조그만 식당의 주인 노부부였다.
여행 일정이 워낙 빠듯해서 꼭두새벽같이 호텔을 나와 오사카성(城)에 가려고
한참을 걸어서 지하철역까지 오니 시장기가 몰려와 탁자가 서넛뿐인 그 식당에 들어갔다.
종업원도 없이, 60줄에 들어선 남편은 금방 문을 연 식당 주방에서 부지런히 움직이고
부인은 식탁 밑을 쓸고 있다가 너무 일찍 들어선 첫손님에게 환하게 웃으며 아침 인사를 보냈다.
5000원쯤 하는 단품 아침 메뉴는 밥, 일본 된장국 미소, 장아찌, 생선구이 하나뿐인 단출한 백반상이었다.
후딱 먹고 나서 밥값을 지불하고 다시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는 부인에게
오사카성을 가려면 어느 창구로 가야 하는지 한문 필담으로 물어봤더니
일본어를 못하는 나에게 곤혹스럽게 설명하다가 주방의 남편까지 나와서 손짓, 발짓했지만 허사였다.
나가려는데 잠깐, 부인이 쓸던 빗자루를 탁자 다리에 기대어 놓고 앞치마를 벗더니 식당 밖으로 나가며
나에게 따라오라는 미소를 보냈다.
그 지하철역은 여러 열차가 교행하는지 올라갔다 내려갔다 이리 돌고 저리 도는 미로처럼 복잡했다.
사뿐사뿐 앞장서서 걸어가는 부인은 가끔씩 뒤돌아 미소를 보내며 손님이 뒤따라오는지 확인했다.
시간을 재어보지는 않았지만 10분이 넘은 것은 확실했다.
코너 하나 돌아서 손가락으로 가는 길을 가리켜 줄줄 알고 멋모르고 따라나섰다가 이렇게 되니
부담감이 납덩이처럼 무겁게 어깨를 짓눌러 앞질러가서 부인을 가로막고 돌아가라 해도 막무가내,
기어코 오사카성 가는 입구까지 나를 데려다줬다.
왕복 30여 분, 금쪽 같은 시간을 5000원짜리 밥 먹은 손님에게 기꺼이 할애했다.
그늘진 곳에 쭈그리고 앉자 상념에 젖어 오사카성의 벚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친절에 감명받았다가 아니라 노부부에게서 무서움을 느낀 것은 왜일까.
둘.
가나자와 시와 이시가와 현이 합자해서 컨벤션국(局)을 만들었다.
6년 전인가 그곳 초청을 받아 3일 동안 이곳저곳을 둘러보는데
나를 데리고 조그만 차를 손수 운전하며 가이드를 한 미노야라는 친구는
40대 후반의 나이에 직급은 과장이었다.
마지막날, 그는 나를 태우고 공항으로 가는 길에 시간이 너무 일러 공항에서 기다리느니
공항 가는 길 옆에 있는 자기 집에서 차 한잔 마시고 가자는 것이다.
집에 도착하기까지 그는 자기 집 자랑을 늘어놓았다.
한 달 전에 자기 집을 팔고 좀 더 여유로운 공간이 있는 집으로 이사가 서재도 꾸밀 계획이고
두 아이의 방도 각자 하나씩 갖게 되었다는 등, 2층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저녁 풍광이 너무나 멋지다는 등….
결과적이지만 나의 뇌리에 그는 엄청 부풀린 그래픽을 주입시켰다.
공항로에서 꺾어 들어가 들판에 띄엄띄엄 앉은 성냥갑(?) 하나 앞에서 차가 멈췄다
그가 내게 그려준 집과 내 눈앞에 나타난 현실의 집은 너무나 달랐다.
20평이 될까말까 한 대지에 건물 단면적은 15평도 못되지 싶은데 그나마 주차공간이 1층의 3할쯤 차지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얼마나 좁은지 두 사람이 모로 비켜가도 도저히 교행이 안 될 것 같다.
난방도 제대로 안 된 이 집의 겨울은 생각만 해도 끔찍스럽다.
화장실은 얼마나 좁은지 폐소공포증 환자는 발작을 하지 싶다.
이전에 살던 집은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집으로, 아버지도 한평생 공무원이었다나.
귀국 비행기에서 내 머릿속엔 3일 동안 둘러본 풍성한 그림들은 모두 사라지고 미노야의 집만 자리잡았다.
일본이 선진국 맞아? 그 넓은 들판에 집은 왜 그리 작게 지었어? 집은 작아도 미노야는 작지 않았다.
셋.
내가 만나고 내가 본 일본인이 아니고 신문·방송을 통해서 듣고 본 일본인들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부산 실내사격장 화재 사고는 2009년 11월 14일 한낮에 일어났다.
죽은 11명 가운데 일본인 관광객이 7명이나 차지했다.
나가사키 한 중학교 동창생들이 우리나라에 단체관광 왔다가 실내 사격장에서 비명횡사한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비집고 살다보니 헤아릴 수 없이 크고작은 사건 사고가 일어나게 마련인데
이 사건이 내 머리 깊숙이 각인돼 지워지지 않는 것은 일본 유족들의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 때문이다.
죽은 아들을 보러, 죽은 남편을 보러, 죽은 아버지를 보러 일본 유족들이 단체로 부산에 와 병원 영안실을 찾았다.
검은 조문복을 입은 유족들이 도열해서 불에 타 죽은 처참한 아들의, 남편의, 아버지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누구 하나 퍼질러 앉아 땅을 치며 내 아들 살려내라, 내 남편 살려내라 통곡하는 사람이 없었다.
관을 잡고 울부짖는 유족도 없었고 소리내어 우는 사람도 없었다.
기껏해야 꼿꼿이 선 채로 어깨를 들썩이거나 손수건으로 눈을 가렸다.
내 기억으로는 미망인이었지 싶다.
기자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나는 이 나라에 두 번 다시 오지 않겠다” 이 말 한마디뿐이었다.
그 말은 비수처럼 내 가슴에 꽂혔다.
조주청/여행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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