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천진에서 주재원으로 근무했다. 중국 직원들에게 업무 지시를 하면 지시가 끝나기도 전에 바로 나오는 말이 바로 '마상'이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빨리, 빨리" 만큼 일상어이다
본디 의미는 말 위에 타고 있으니 바로 출발, 즉시 실행하겠다는 의미일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별로 '마상'이 의미하는 시간은 개인별로 제각각 이었다. 팀장, 부장 이하 직급에 따라서... 그래서 우스게로 팀장은 몇 분이내, 과장은 몇분 이렇게 개인별 마상의 시간을 정한 적도 있다.
실제 '马上' 이란 말을 탔다는 것이지 출발은 언제 시작될지 모른단다.
그런데 요즘 내가 많이 게을러졌다.
무언가 해야할 일을 마음먹고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어슬렁거리듯 그렇게 행동을 하니 내가 봐도 한심스럽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몸이 그리 따라주지 못해 늦게서야 반응한다. 그러다보니 아내의 주문은 늘어나고 반복되고, 그러다보면 마음 상할 일이 한두번이 아니어도, 아내는 꾹 참고 잘 견뎌주고 있어 고마울 뿐이다.
참 중국어에 '马上' 과는 다른 '路上' 이란 단어가 있다. 말위가 아니라 도로위이니 이미 출발했다는 의미일게다. 중국어는 표의문자이기에 한번만 더 생각해보면 의미가 참 남 다르다. 때로는 그 글자의 의미의 신묘함에 나도 모르게 무릎을 치곤 한다 .
하루가 행복하려면 이발을 해라. 한달 동안 행복하려면 말을 사라. 한해를 행복하려면 새 집을 지어라. 그러나 평생을 행복 하려면 정직하여라.
[좋은글, 영국속담]
머리가 좀 길었다. 지난 주에 이발을 하려다가 미루었는데 아내가 자주가는 집 근처의 단골 미용실에 예약을 했단다.
오전 열시반 원장 예약.
아파트 신호등 건너이기에 보행신호 대기중에 아내가 말한다. 저기 빗자루 들고 청소하는 분이 원장님이라고... 일단 달라보였다. 직원 한명만 더 있어도 사장티를 내는 모습이 아니라서
입구에 들어서자 모두들 반갑게 맞이해준다. 원장은 젊은 나이에 목소리까지 시원시원하다.
상의를 벗고 권해준 의자에 앉았다. 특별히 부탁해서일까? 머리카락를 자르기 전에 먼저 내 머리 형태를 일차 살핀 후에 자세히 손가락으로 내 두상을 만지면서 특이사항을 체크하는 듯 했다.
일단 신선하다.
왜냐면 사람마다 두상이 다르고 나의 경우에는 뒷꼭지가 좀 남다르게 튀어나와서 머리를 깍을 때 자연스러움을 유지하려고 하면 좀 난감해하며 자연히 신경이 곤두서는 듯 어려워하는 이용원 직원들이 많았다. 요즘들어 머리를 깍을 때 대부분 편리한 바리깡(? 전기 이발기)을 이용하여 속전속결로 머리를 다듬는데 억지로 익숙해졌다.
특별한 부탁이고 내가 이곳에는 처음이라 그런지 가위로만 머리를 자르고 다듬었다. 빠르다는 건 무언가 희생 하나를 동반하듯 그렇게 바리깡으로 깍거나 다듬은 머리는 처음 보기좋은 형태에서 일주일만 지나도 제멋대로 자라 금방 티를 내곤 한다
지금까지 이용원, 미장원 그러다 다시 이용원을 다녔다. 나이에 따른 선혿일까?
서울 집에서는 저렴한 플랜차이즈 이용원을 이용했는데 직원도 자주 바뀌고 주로 속전형 바리깡 이발이라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가성비로 위로를 하곤 했다. 그럼에도 지난번 머리를 깍은 이후 유난히 머리가 마음에 안든다고 했더니 아내가 이곳(가재울 미용실)에 예약을 했는데...
괜찮았다.
원장선생님이 마무리로 머리를 말리는 드라이를 하면서 아내에게 내 머리결의 특성을 설명하면서 관리 비결도 전해준다. 오랜 항암과정에서 머리숱도 줄고 머리카락이 얇아지고 가늘어지면서 힘이 없어지다보니 머리가 죽어보인다. 다시 머리카락에 힘을 준다
돌아보면 내게도 인상에 남는 이용원(미장원)이 몇군데 있다.
늘 아버지가 다니시던 이용원만 다니다가 (어렸을 땐 의자난간에 깔판을 대고서 그 위에 앉아 머리를 깍았었다 ) 대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다니시던 미장원엘 처음 가게 되었다. 처음으로 들힌 미장원의 내부의 낯설음과 어색함은 그 시절 그 나이의 내게는 더군다나 어머니와 함께여서 쑥스럽기까지 했다.
몇번 들리면서 미장원 분위기 그것도 동네 미장원의 수다스러움에 익숙해지면서 동네의 모든 소문의 발현지이자 중계지인걸 알게 되었다. 대학생 그것도 젊은 사내이자 친구 아들인 내가 있어도 그 뒷얘기들은 (차마 글로 옮길 수도 없는) 내 귀로 자연스레 흘러들었다.
아마 이발을 하면서 가장 인상적인 이용원으로 아내랑 단둘이 운여을 하셨다. 25년전 그 당시에 일흔이 다되신 사장님은 이용부문 세계대회에서 기능장을 수상하셨다는데 첫 손질부터 마무리까지 오로지 가위손이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가위손으로만 자르고 다듬으면 걸리는 시간은 배인데도 그래야 다음 머리 깍을 때 까지 처음 형태가 살아있다고 가위손만 고집하셨다. 그래서 그 당시의 내 머리가 제대로 살려 있었을까?
중국에서 근무할 때 중국식 이발 도 해보고 (거의 머리를 자르지 않고 가위로 쏙아내는 형태의 이발.... 처음엔 어색한데 시간이 지날수륙 자연스러워지는 머리형이 된다)
또 다른 이발소는 아침 일찍 전직원이 가게 앞에 모여 구호도 외치고 춤도 추며 청소와 함께 하루 일과를 시작한 특이한 곳도 있었다.
좋은 말 100개를 들어도 나쁜 말 1개에 울적해져 버리는 게 사람 마음인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늘 너에게 예쁜 말만 해줄거야 네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네가 늘 웃을 수 있게
암환자로 투병 생활이 길어지면서 반대로 줄어드는 건 평소의 그나마 나름 자랑거리(?)였던 '인내심'이다 . 예전같으면 별일도 아니라고 무심코 넘기거나, 무얼 부탁하거나 심부름등을 시키거나 궁금한걸 묻고서는 그래도 나름(?) 여유있게 기다렸는데 요즘은 그새를 못 참고 한번 더 재촉이니 내가 봐도 큰 일은 큰 일이다. 원래 일이라는게 각자에게 순서가 있고 경중이 다르니 부탁을 해도 내맘같지 않다는 걸 종종 잊어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까지도 환자가 된다.
병을 안고, 그것도 암환자로 살아간다는 건 투병 생활이 길어질수록 남(보호자)에 대한 의존성이 커진다는 것이다 . 그래서일까? 환자이기 이전에 내게 있어 가능할 것 같은 일들을 내 스스로 하고싶어 하는 것은 어쩌면 마지막(?) 남은 내 자존감을 지켜내고 싶다는 기본적인 욕망인지도... .
간혹, 내가 능히 할 수 있는 어떤 조그마한 일 하나에도 누군가(보호자)가 해주겠다고 하면 나도 모르게, 심지어는 상대가 다소 민망해할 정도로 소리를 높혀 "내가 할께요" 라고 말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내가 할께요!"
그래서 이 말은 마지막 내 자존감 같기도 하다.
내 평소 몸무게 70kg 좌우에서 어느새 52.5kg으로 25% 정도 빠져 내가 봐도 깜짝 놀래는데...
뼈만 앙상하게 남은 나를 보면서 힘들어 보이는 거 하나라도 덜어주려는 아내의 속깊은 배려에도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질 때가 있는 것이다.
엊그제 항암치료를 위해 집을 나서려 옷을 갈아 입는데 갑자기 아내의 눈시울이 붉어졌고 이내 눈물방울이 방자닥에 툭하고 떨어졌다. 나는 아내에게 굳이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러자 아내가 그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나의 바짝 여윈 뒷모습이 너무 안스러웠다고 ...
1년하고도 3개월이 조금 넘었다. 보는 시각에 따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암환자로써의 생활이었다.
꼭 환자복만 입어야 환자인건 아니지만 병원에서 입게되는 환자복이 주는 획일성은 잠시 놓아두었던 일상의 자유에서 다시 환자라는 심리적인 가두리 안으로 나를 가둔다.
그리곤 그냥 두어도 될 것들로 다시 재생시키곤 한다.
투병생활이 길어질수록 만나는 사람들의 수와 폭이 줄어들고 있다. 그러다 보니 생각과 사고의 폭 역시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런 악순환은 갈수록 나의 생각을 편협하게 만들고, 내중심적 사고로 몰아갈 것이다.
더군다나 환자로써 조금은 이해받고 싶고, 보호받아야한다는 사회적, 심리적 통념까지 끼어들면 아주 사소한 것에서 주위 사람들과 마찰을 일으키게 된다. 즉 상대에 대한 배려에 대한 이해와 감사는 갈수록 줄어들면서 (당연시?) 내 생각 그리고 내 방식이 "더" 옳다는 착각 속에 빠지는 것이다.
여기서 굳이 "더" 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맨 윗글은 오래전에 글을 이어쓰려고 임시저장해 놓았는데 최근들어 과거 글이나 임시글들에 있어 수정이 불가한데다, 때마침 아내와 사소한 것들에서 다툼 아닌 다툼이 있어 새로이 되돌아 볼겸해서 다시 옮겼다.
다툼의 상처는 그 크기와 다소를 떠나 마음을 상하게하는 상처 자체로는 거의 동일하다고 봐야한다. 더군다나 그 상처를 준 이가 내편이라 믿은 사람에게서, 그것도 논리적으로 틀리지 않아 상대는지극히 객관적인 조언이라는데 충고나 조언이 아닌 내편을 원한 아내는 정작 상처를 받은 것이다.
그것도 남편인 나에게...
내편이라 믿었던 상대에게 받은 상처는 그 크기가 적어 마치 이삼분가량 누르면 멈추는 지혈처럼 금방 상처는 아물게 될 것이고 남들은 모를것이다. 그러나 사소한 것이라고 지혈을 소홀히 하면 피는 피대로 그리고 그 곳에 파란 멍이 들듯, 생각보다 그 상처의 후유증은 길게되고 그 멍으로 인해 바라지 않던 제3자까지 알게되기도 한다. 그 곳은 또 다시 상처와 지혈이 반복될 것이고, 결국 지친 혈관 스스로 숨어버리듯 생각지도 못할 일에 직면할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않으면 참을 수 없는 울화병같은 상처나 소소한 상처나 살을 에이는 아픔은 동일하다.
그래서 한번 더 생각해보는 약속이다.
십여년 전, 잊지않고 메일로 좋은 글을 전해주던 정혜신(심리상담사)님의 말이다.
“충조평판(충고·조언·평가·판단)을 하는 것은 필요하고 도움이 돼서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상대가 만만해서 하는 거다. 명확한 자의식을 가진, 개별적 존재로 의식하고 존중하면 그렇게 하지 못한다.”(정혜신)
은퇴하면 봉사하는 활동에 시간을 내어야겠다고 뒤로 미뤄뒀는데 막상 퇴직을 하고보니 이제 현실적으로 육체적인 봉사는 어렵게 되었다. 역시 무슨일이든 마음먹으면 뒤로 미루지않고 쇠뿔도 단김에 빼듯 바로 실천해야지, 바쁘다고 뒤로 미루다보면 이런 경우가 허다하게 발생한다.
그나마 오랫동안 그리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두어군데 소액이나마 꾸준하게 기부를 해온 단체가 있다. 엊그제 그 중 한 곳에서 안정족인 보금자리를 마련했다는 기쁜 소식지를 보내왔다.
그 내용을 읽어보다가 그 보금자리 마련 이전에 34년 동안 13번 이사를 하면서 겪었던 사연들이 적혀있었다. 이사하는 날 시설 현황을 보고 바로 방을 빼달라거나, 얘기가 잘되어 이사하려는데 계약을 물려달라는 등의 그동언 겪었던 어려움들이 묻어 있었다.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드디어 보금자리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이제 이사에 대한 걱정거리 하나가 사라졌다는 얘기는 남의 얘기가 아닌 나의 어린시절 기억이기도 하다. 나의 어린 시절에 겪었던 집없는 설움, 더 나아가 아이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주인에게 당한 설움으로 어머니의 남몰래 숨죽여 우는 것을 몇차례 모른척하고 지켜보아야 했던, 셋방살이의 설움 그대로였다.
국민학교 입학전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광주의 변두리로 어머니, 나, 그리고 동생 둘이랑 함께 이사를 왔다. 지금 어머니께서 사시는 곳에서 3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으로 (이상하다. 어디선가 첫 삶의 터를 잡으면 쉽사리 그곳을 못 떠난다. 나도 직장따라 서울에 처음 정착한 곳애서 근 15년을 셋집살이로 맴돌았으니 ) 이사온 첫날밤 방틈새로 스며든 연탄가스로 온식구가 거의 죽다가 살아났다. 그때 옆집의 아주머니가 주신 동치미 국물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당시 연탄가스 마시면 동치미 국물을 마시게 하는게 민간 요법이었다. 그래서 그 집을 떠나 같은 동네로 옮겼다. 아이들 셋의 영향으로 몇달 못살고 쫓겨나다시피 이사를 했다. 이번에는 조금 멀리 떨어진 곳으로 집을 얻을 때 아이는 나혼자인 것 처럼 하고 식구수를 줄여 집을 얻고서 이사를 했다. 이사 당일에 나만 함께 이사를 하고 두 여동생은 밤늦게 데려왔다. 결국 며칠 지나지 않아 주인댁에서 알게되어 그에 대한 잔소리를 했는데 이사가라는 말은 없었다. 주인집에도 아이들이 다섯명이나 되어서인지 이해를 해주었고 또래들이어서 조금씩 나아졌고 거기서 네째가 태어났다. 물론 아이들이 떠들면 떠든다고 주인댁에서 싫은 소리를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 주인은 양반에 가까웠다.
우여곡절 끝에 두어차례 더 이사를 했고(부엌도 없던 행랑채 비슷한 곳에 수돗물도 없이 옹달샘물을 먹던 준 산골집도 거쳤다 ) 그 사이에 네째가 태어났고, 마지막으로 지금 집에서 막내 여동생이 태어났다. 그집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땀으로 지은 집이다. 산밑 산번지의 땅을 사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매일 새벽에, 일을 마친 저녁에 땅을 파서 평지로 메꾸는 작업을 했고 당신의 직업을 살려 비록 무허가지만 방세칸을 뚝딱 지었다. 이사를 마친 다음날 어머니는 그날 처음으로 발뻗고 편히 주무셨다 했다. 그 뒤로도 집 뒷편을 파내는 작업이 계속되었고 근 일년만에야 터다운 집이 되었다. 그 사이 상하방 한칸을 더 달아냈고 두어번 축대가 무너져 고생하기도 하셨다. 그래서인지 방을 세내어줄 때 아이들 많은 걸 가리지 않고 세를 내어줬고 그뷴들과 사이좋게 살았던것 같다. 지금도 우리 집을 거쳐간 분들과 왕래도 하고 애경사도 챙기고, 모임도 하는걸 보면 ....
이야기가 다소 다르게 흘렀다.
봉사 이야기를 하고싶었는데... ... 이제는 육체적 봉사는 엄두를 낼 수 없을 것 같아서 아쉽고 씁쓸하다. 은퇴를 하면 이런저런 봉사를 해야지하고 염두에 둔 봉사는 이제 물건너 간 셈일까?
아직도 난 그 희망을 버리지는 않는다.
년말, 성탄절이 다가오자 그 기부 단체에서 감사의 인사와 함께 안부를 물어온다.
내가 드리는 기부액이야 소액이지만 그 분들에게는 큰힘이 되었으면 하는 욕심을 내어본다.
어렸을 때 미국 한 할머니에게 매달 5달러씩 후원받은 어느 분의 이야기다. 그 분 역시 그 도움을 잊지않고 페루의 아이들을 계속 후원하고 있다.
기부나 봉사활동을 망설이는 이들에게 그는
“중간에 후원을 멈추면 아이들이 상처받을까 봐 걱정하는 사람도 많은데 일단 한 번이라도 해보길 권한다”며 “망설이면 아무것도 안 된다. 작아 보이는 5달러나 2만~3만원이 누군가에게는 잊을 수 없는 ‘장난감 기차’나 ‘만년필’처럼 작은 기적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