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구로다 세이키作>

 

아래 시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소설도 좋지만 시는 더 좋습니다.

일단 긴 시간을 투자하지 않아도

느끼는 감동은 소설보다 더 나을 때가 많습니다.

현대인 병의 하나인 "빨리 빨리"에 익숙해진 이유도 있겠지만

꼭 그 이유만은 아닐 것입니다.

 

얼마전에 "세족식"에 대한 내용으로  본 블러그 (티스토리)에 느낌을 적은 바 있는데

발을 씻긴다는 것은 자신을 낮은 자리로 내려놓고서 겸손을 실천하는거라 했습니다. 

 

천주교(카톨릭)로 개종하기 전에도  카톨릭 신자들의 신앙과 생활을 보면서 

자신을 위한 기복신앙이 아니라 남을 위하는 보편지향기도가 참 좋았고 지금도 좋습니다.

게다가  매 미사 때 마다 "제탓이오, 제탓이오, 제 큰 탓이옵니다. "라고 자복 회개하는 기도도...

평소에 지은 죄가 많아서 더 큰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라 해도 괜찮습니다. 

 

지난 편지 글에서 아들 녀석의 기도 제목 세가지를 읽고서

(아래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세 가지 기도 모두가 순수히 남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저도 제아들 녀석의 기도가 응답 받도록 그를 위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아래 시의 느낌에서 오는 기도를 다시 생각해 보는 저녁입니다. 

 

 

그 저녁은 두 번 오지 않는다 

        

                                        이면우

 

무언가 용서를 청해야 할 저녁이 있다 
맑은 물 한 대야 그 발 밑에 놓아 
무릎 꿇고 누군가의 발을 씻겨 줘야 할 저녁이 있다 
흰 발과 떨리는 손의 물살 울림에 실어 
나지막이, 무언가 고백해야 할 어떤 저녁이 있다 
그러나 그 저녁이 다 가도록 
나는 첫 한마디를 시작하지 못했다

누군가의 발을 차고 맑은 물로 씻어주지 못했다

Posted by 한글사랑(다향)

 

 

저는 개인적으로 나무, 아니 화초나 꽃나무 키우는 것을 좋아하는 편 입니다.

그렇게 기르다가 이사할 때 즘에는 거의 남들에게 주고 떠났는데

아직 이곳에서는 나무나 화초는 키우지 않고 있습니다.

 

아래 글에 대해서 저는 실감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키우는 화초에게 시간나는대로 말을 걸고 내 마음을 전해줍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그 화초나 꽃나무는 풀이 죽어 있다가도 싱싱해졌습니다.

여수에서 살 때에도 서울 집에 가면 가족과 인사를 나눈 후 

반드시 베란더의 나무들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나 없는 동안에 잘 있었느냐고 ..."

그리곤 습관처럼 이파리를 닦아주고서 물을 주곤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잘 자라고 꽃도 제 대 풍성히 피워주었습니다.

 

어찌 화초뿐 이겠습니까?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이겠지요.

중국에와서 안통하는 언어로, 안되는 중국말로

내가 전하고 싶은 ,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의 반도 못한 지난 일년이었습니다.

이제 조금 걸음마를 시작한 단계처럼 여겨지는데 

그래도 중국 직원들이 제 진심을 알게되고 이해해 주면 그 벽을 쉽게 넘을 것 같습니다.

나 역시 부족하지만 있는 그대로,,,

과거 한국에 있을 때 같은 팀 동료들에게 했던 그대로 마음을 내어놓을 것입니다.

조금 더 다가가고 조금더 노력하고 조금 더 기다려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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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에 꽃을 피우는 방법


* 세상 모든 것의 진짜 유일한 마술
유일한 힘, 유일한 구원, 유일한 행복,
심지어 죽어 가는 것까지 살려 내는 경이로움
사람들은 이것을 소위 사랑하는 것이라고 부른다

                                       -헤르만 헤세-

꽃이 너무도 좋아 조그만 화원을 운영하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날도 여느 때처럼 꽃들을 정성스럽게 돌보고 있는데
한 젊은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저희 집에는 무려 7년 동안이나 꽃을 피우지 않은 나무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꽃을 피울 수 있을까요?"
그녀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느닷없는 질문에 조금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곧 마음의 평정을 찾고는 상대에게 물었습니다
"나무가 어떤 종류예요?"
젊은이는 그녀의 질문에 우물쭈물하며 대답했습니다
"잘 모르겠는데요."
젊은이의 어정쩡한 대답에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가 다시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은 그 나무를 좋아하십니까?"
젊은이는 사실 그 꽃나무를 친구가 선물로 준 것이기 때문에 버릴 수
없어서 억지로 키우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당신의 아내는 그 꽃나무를 좋아합니까?
그리고 당신의 식구들은요?"
그녀의 질문에 젊은이는 시큰둥하게 대답했습니다
"당연히 좋아하지 않지요.
7년씩이나 꽃 한번 피우지 않는 나무를 좋아할 리가 있습니까?"


그제야 그녀는 그 꽃나무가 오랜 시간동안 꽃을 피우지 않았던 이유를 알겠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어떤 사람이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좋아하겠습니까? 마찬가지 아닐까요?
만일 당신이 나무라면 주인이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데도

그를 위해 무럭무럭 자라서 꽃을 피울 수 있겠습니까?"
계속 말을 주고받던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동안의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그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지금부터 정원에 있는 그 꽃나무를 잘 살펴보세요. 그리고 그 나무를 좋아하게 될만한

것들을 찾아보세요. 그 다음에는 너같이 멋진 나무가 나의 정원에 있어서 기쁘다고

이야기  해 보세요. 그러면 반드시 꽃이 필 것입니다."
그녀의 말에 젊은이는 당황한 듯이 이내 전화를 끊었습니다.


두 달쯤 후, 그녀의 정원에는 싱그러운 전화 한 통이 걸려 왔습니다
"안녕하세요. 혹시 두어 달 전에 꽃이 피지 않는 나무에 대해 조언을 구하던 사람인데

기억하시겠습니까?
부인께서 시키는 대로 했더니 그 나무에 거짓말처럼 꽃이 환하게 피었답니다.
고맙습니다. 많은 깨달음을 주셔서 말입니다."

Posted by 한글사랑(다향)

 

 


엊그제 아들이 보내온 편지 중에 나(아빠)의 등을 밀어 주고 싶다는 글이 있었습니다.
이 전하는 편지 글을 보면서 아버지에 대한 생각에 다시금 젖어 들었습니다.


당신이 돌아가시기 전 해의 마지막 달에 광주 본가 근처의 오래된 목욕탕에 아버지 등을
밀어드렸는데 아버지 몸을 씻겨 드리면서 나는 내내 울고 있었습니다.

욕탕 안의 자욱한 수증기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습니다. 

 
이 후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하시기 한달 전 쯤엔가

다시 등을 밀어드리겟다고 목욕을 권하시자 "나중에 몸 좋아지면"이라고 답하셨는데
끝내 다시 당신 등을 밀어드리지는 못하였습니다.

아마 당신의 뼈만 앙상한 모습을 아들이지만 보이시기 싫으셨던게 아닌가 하고

지금은 그렇게 위로를 삼고 있습니다.

그 앙상하신 몸을 아들에게 맡기셨을 때의  당신이 느끼셨을 처연한 기분도

한번쯤 더 생각했어야 했었는데 생각이 짧았던게 아닌가 하고 되돌아 봅니다.


아래 블러그에 있지만 아버지의 등을 미는 내용의 시의 주인공 아버지 처럼 ... ...

(좋아하는 시의 카테고리에 있는 "아버지의 등을 밀며 ...손택수" 참조)

함께 시간을 맞추면 내 등을 아들 녀석에게 맡겨 볼 생각입니다.

기독교 신앙에는 "세족식"이 있습니다. 

물론 불교에도 이런 의식이 있습니다. 때로는 망자에 대한 세족의 의식도 있지요.

그런데 이 세족식의 본질은 "겸손과 섬김"이라고 생각합니다.


상대의 발을 씻겨줄려면 일단 상대보다 낮은 위치에서 무름을 꿇어야 합니다.
나를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놓는 것이지요.
그리고 상대를 지고 다녔던 발을 씻기우는 것!
발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는 더이상 낮아질 데가 없는 곳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그 발보다 더 낮은 위치에 서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미 한없는 낮춤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얼굴과 손은 가꾸고 치장을 하지만 발은 본디 감추어지는 것이기에
어찌 보면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막상 발을 싯기운다는 것에 대해서 때로는 스스로의 치부로 여겨서

거절할 수도 있지만 그 세족식은 여러가지 깊은 의미가 있는듯합니다.

 

아들은 나의 등을 밀어주고
난 아들의 발을 씻겨주는 숙제같은 선물의 행사가 하나 생겨났습니다.
이제는 나보다도 거 커버린 아들이지만 어렸을 때의 기분도 함께

 

아래의 시는 역설적이다.

사랑을 가르치지 않아도 사랑이 넘치는 시대에 대한 바램이다.

종교가 가장 번성한 시대에 사는데
많은 이들은 역설적으로 기독교에는 사랑이 부족하고 불교는 자비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신앙인으로써 다시 한번 곱씹어 보아야 할 하늘의 소리이다.

(참고로 아래 시는 제가 좋아하는 시는 아닙니다.)

 

 

세족식을 위하여

 

                                   정호승

 

사랑을 위하여
사랑을 가르치지 마라
세족식을 위하여 우리가
세상의 더러운 물 속에 계속 발을 담글지라도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 마라

지상의 모든 먼지와 때와
고통의 모든 눈물과 흔적을 위하여
오늘 내 이웃의 발을 씻기고 또 씻길지라도
사랑을 위하여
사랑의 형식을 가르치지 마라

사랑은 이미 가르침이 아니다
가르치는 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밤마다 발을 씻지 않고는 잠들지 못하는
우리의 사랑은 언제나 거짓 앞에 서 있다

가르치지 마라 부활절을 위하여
가르치지 마라 세족식을 위하여
사랑은 가르치는 시대는 슬프고
사랑을 가르칠 수 있다고 믿는
믿음의 시대는 슬프다

Posted by 한글사랑(다향)

 

 

오늘 하루 개인적인 종교를 떠나서
아주 작은 사랑 하나 남몰래 실천해 보는
행복한 성탄절 함께 만들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크고 거창한 일 보다는 
아주 작아 표시도 안나는 일들일지라도
내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착한 일 하나가
모이고 모여서 이 각박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한줌 사랑이 어둠을 밝히는 촛불처럼
그렇게 따스한 사랑의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아주 작은 착한 일 하나 행하여 보는 것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이 까짓 일이 뭘! " 하며 행한 사소한 일들이
나비효과 처럼 그렇게 큰 변화를 일으켜 왔으니까요.

 

 

             <131224>

Posted by 한글사랑(다향)

 

 

산을 오르기 전 신발을 벗어 먼저 그 안에 작은 모래가 한 알이라도 있는지를 확인한다. “한두 개 모래알이 굴러다니기 시작하면 온통 거기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다. 신경을 빼앗기면 집중을 할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자칫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산을 올라가기 시작하면 해발 몇천 미터에서 다시 등산화를 벗을 기회는 거의 오지 않는다. 겨우 모래 한 알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산악인 엄홍길 대장>


어제 레지오와 미사에 참례차 나서는데 운동화에 있는 작은 모래 두어알이 내 발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디.

걷는 내내 이의 불편함을 알면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신발을 벗어 그 모래를 털어내었습니다. 

한번 신은 운동화는 그리 쉽게 벗을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적당히 멈추어서서 신발을 벗어 털어낼 공간도 마땅치 않고

더군다나 신발을 벗을 그 짧은 시간마저도 내게 여유가 없을 때가 있나 봅니다.

위 엄홍길 산악대장의 말이 실감나게 맞는 말입니다.

 

천진에서 생활하면서 정기적으로 마음 먹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행하는 게 냉장고 정리입니다.

냉장고라는게 일종의 보관 창고 개념(?)이라서 한번 속으로 들어가면 쉽사리 버려지지 않고

또 다시 다른 것들로 채워지고 , 어떤 것은 우선 순위에서 밀려 그냥 빈 공간만 차지하게 됩니다.

마음 한켠에는 차가운 냉장고이니까 안전하겠지라는 쓸모없는 믿음도 그리 만드나 봅니다.

그러다 보니 냉동실은 정리 대상에서 아예제외시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곽 차버린 냉장고 안을 보고서야 슬슬 정리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정리의 첫걸음으로 한동안 더 이상 추가로 냉장고에 물건을 넣지 않도록 하고

기존의 내용물은 서서히 부피를 줄이다가 비워내고 한계에 부딪히면 아깝지만 그냥 버리기도 합니다.

하루에 한끼에서 많아야 두기 식사를 하니 편의상 눈에 보이는 반찬만 꺼내는 경우가 많기에

깊숙히 넣어둔 반찬은 이렇게 마음먹고 정리를 시작할 때에야 눈에 띄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는 것도 그러하질 않을까 합니다.

내가 가진 것이나 능력을 잘 모르고 쉽게 사용가능하거나 손쉬운 것만 늘 곶감 빼어먹듯

그리 단순하게 이용하는 것 처럼. 그러다 어느날에야 내 자신을 다시 보게되는 경우가 왕왕...

 

처음엔 별반 차이를 못느끼고 살다가 어느 날 정리를 해야겟다고 마음먹는 순간에야 눈에 보이는 집안의

심하게 어질러진 정리안된 물건들을 방안을 보면서 아주 사소하지만 정리를 하고 안 하고의 미묘한 차이가

결과적으로 아주 큰 차이를 이끌어 낸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어질려지려 할 때 바로 바로 정리를 했다면 별도로 시간을 내지 않아도 될 것을

특별히 날을 정하고 귀중한 시간을 할애하여야 하니....

 

이번에도 역시 줄이고(저장 그릇 수를), 먹다가 안되어  버리기도 하였습니다.

덤으로 방안에 보관되어 있는 물건들을 과감히 버렸습니다.

버리기에는 아가워 보관하다보니 제법 쌓였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 이후 이용한 적이 없는 것을 보면

버려도 생활에는 젆 지장 받지 않을 무방한 것입니다.

 

결국 정리는 단순한 ‘잡무’가 아니라 모든 일의 중요한 시작점이자 완성점이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그래도 깨끗하게 정리된 모습들을 보면 마음 까지도 정리된 듯 환해집니다.


 

Posted by 한글사랑(다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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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일상을 통해 사람사는 이야기와 함께, 항암 관련 투병기록 및 관련 정보 공유를 통해 치유에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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