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개인 여름 아침.

 

                    김광섭

 

비 개인 날,

맑은 하늘이 못 속에 내려와서

여름 아침을 이루었으니

녹음이 종이가 되어

금붕어가 시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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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범람하는 게 시입니다.
그리고 가만히 살펴보면 
시라기 보다는 그냥 아름다운 미사여구만 꿔놓은듯
말초 신경만 살짝 건드러 놓고마는 느낌입니다.
어쩌면 바쁜 시대, 아니 바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여서 더 그런가 봅니다.

 

그리고 시같지 않은 것을 시라고

저작권 운운하면서 나불거리는 사람들을 보면 더 그렇습니다.

저야 뭐 시에 관심은 있지만 시를 쓰는 사람도 아니고

그래서 시를 잘 모르지만 ...

 

한 동안은 아름다운 시보다는 현실을 꼬집어주는 시가 더 다가서기도 했지만

결국 고향집 처럼 오랫동안 자리잡아 마음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시는 다릅니다.

 

오늘 멀리 서울의 식구가 오랫동안 살던 목동을 떠났습니다.

아이들이 유치원 시절 부터 대학생이 될 때 까지 정들엇던 곳입니다.

낯설은 곳이지만 지금 살던 곳보다는 조용한 곳이라 더 나을 수도 있겠지만

스물 하루가 지나기 전에는 조금은 어색함이 깃들겠지요.

별거 없는 것 같은 가재도구도 막상 이사를 하면 정리하는데 한참 시간이 걸립니다.

지난번 이사하던날 그날 저녁 아내의 얼굴 표정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곳에서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만 그득했으면 합니다.

멀리서 행운이 깃드는 집, 평화가 넘치는 집으로 그려 놓았습니다.  

 

 

Posted by 한글사랑(다향)

然後知 연후지

(뒤에야 알았네)

"靜坐然後知 平日之氣浮
守黙然後知 平日之言燥"

( 정좌연후지 평일지기부
  수묵연후지 평일지언조)

'고요히 앉아 본 뒤에야
평상시의 마음이 경박했음을 알았네.
침묵을 지킨 뒤에야
지난날의 언어가 소란스러웠음을 알았네.'

          

ㅡ 진계유(陳繼儒 1558~1639, 명나라 문인) -

 

글의 원문)

靜坐然後知 平日之氣浮 정좌연후지 평일지기부
守黙然後知 平日之言燥 수묵연후지 평일지언조
省事然後知 平日之費閒 성사연후지 평일지비한
閉戶然後知 平日之交濫 폐호연후지 평일지교람
寡慾然後知 平日之病多 과욕연후지 평일지병다
近情然後知 平日之念刻 근정연후지 평일지염각

'고요히 앉아 본 뒤에야 평상시의 마음이 경박했음을 알았네.
침묵을 지킨 뒤에야 지난 날의 언어가 소란스러웠음을 알았네.
일을 돌아본 뒤에야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냈음을 알았네.
문을 닫아건 뒤에야 앞서의 사귐이 지나쳤음을 알았네.
욕심을 줄인 뒤에야 이전의 잘못이 많았음을 알았네.
마음을 쏟은 뒤에야  평소에 마음씀이 각박했음을 알았네.

   ㅡ 안득장자언/安得長者言 중에서

 

*진계유는 중국 명나라 말기의 문인으로 장쑤성(강소성) 화팅(華亭) 출생이고, 명 말 당시 서계로부터 인정받을 정도로 문장이 뛰어나 그의 글을 극찬한 사람이 숱하게 많았는데, 위 시는 진계유의 수신과 처세에 관한 격언집인 안득장자언(安得長子言)에 실려 있습니다.

 

진계유는 위와 같이 글재주가 뛰어났지만 나중엔 모든 것을 버리고 쿤산(崑山) 남쪽에 은거하였고, 원래 위 시는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었는데, 류시화 시인의 시집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에 인용되면서 덩달아 유명해졌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크든 작든 항상 후회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일을 행하고 난 뒤에 바로 후회하기도 하지만

속으로 삼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중국 시가 가지는 특성상 (외국어 이기도 하고) 우리 말로 번역을 하면

조금은 단조로워지는 특성이 있고

중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큼 간동을 받지는 못합니다. 

 

 

Posted by 한글사랑(다향)
 

 

 

마종기 시인 © News1

 


5년만에 신작시집 펴내

(서울=뉴스1) 권영미 기자 = "자유가 무엇을 주었냐고 하면 몸 떨리는 외로움이라고 말할밖에 없다. 세상을 떠돌던 그 허름한 나그네가 무엇을 주었냐고 하면 소리 죽인 울음만 쌓여 목이 쉬었다는 말. 그러나 고국을 떠난 깨끗한 영혼이 깨어 있었기에 더 할 말이 없냐고 물어본다면 힘차고 거침없었다는 말을 보태고 싶다."('어머니, 자유, 9월의 긴 여행,' 중에서)

마종기(76) 시인은 맑고 따뜻하며 때로 서늘한 시어로 그리움과 외로움을 노래하는 시인이다. 1966년 한국을 떠난 후 수십년간 미국에서 의사로 살아왔기에 '정들면 고향이지'하는 말처럼 서러움도, 그리움도 잦아들만 하지만 그의 시는 시종일관 결핍과 그리움을 토로해왔다.

28일 문학과 지성사 건물내 한 카페에서 만난 마종기 시인은 왜 그리도 고국을 그리워했냐는 질문에 "1960년대 오하이오 주의 데이튼, 컬럼버스같은 중소도시(시인이 처음 정착했던 곳)는 쌀이나 배추 파는 데도 없고 한인도 별로 없던 곳이었죠. 부모형제와 떨어지고 벗들과도 만날수 없었던 데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식에도 갈 수 없었던 처지가 서러웠던 것 같습니다. 또 편도로 끊고 온 550달러나 되는 거금의 비행기 삯도 매달 갚아야 했고 자동차도 없이 살아야 했던(미국 중소도시는 자동차가 없으면 물 한 병 사러 나갈 수도 없다.) 가난도 향수의 한 원인이었던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1959년 연세대 의과대학 재학중에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마종기 시인은 의대 졸업 후 공군 군의관으로 군무하다가 1965년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에 문인 105명과 서명했다. 그는 이 때문에 방첩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출국을 조건으로 겨우 풀려나 1966년 미국땅으로 떠났다. 그로부터 4개월 후 동화작가인 아버지 마해송은 작고했지만 쫓겨난 몸인 아들은 장례식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일간지 기자로 일하던 동생은 남북대화 국면에서 이산가족인 큰아버지의 편지를 몰래 북의 기자를 통해 전해주다 해직된다. 생계가 막막해 동생은 미국의 형을 찾아왔고 10여년 후 자신이 운영하던 잡화점에서 강도에게 목숨을 잃는다. 결국 고국의 정치상황은 마종기 시인의 인생에서 많은 것을 앗아간 게 됐다.

5공화국은 다시 그의 시집에 생채기를 남겼다. 1980년에 나온 그의 시집 '안보이는 사랑의 나라'(문학과 지성사)에서 해설을 쓴 김주연은 3~4편의 시를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그 중 2편은 시집에 수록되지 못했다. 군부정권이 빼버린 것이다.

시인은 "아직도 그 시들이 왜 빠져야 했는지 모릅니다. '동장 아저씨를 인민군들이 총살했다' 같은 시구가 있었는데 그게 문제가 됐는지..."하고 중얼거렸다. 문학과 지성사는 김주연의 해설을 수정없이 그대로 내보냈고 이후 정권이 바뀌었지만 2편의 시를 다시 넣지 않았다. '상처받은 시집'의 상흔을 그대로 유지한 것이다.

시인은 지난 26일 아버지 마해송의 전집 10권을 완간했고 자신의 열한 번째 신작 시집 '마흔두 개의 초록'(문학과지성사)도 펴냈다. 이 시집의 해설 역시 김주연 평론가가 썼다. 마종기 시인은 "70대 나이의 평론가가 해설을 쓰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지만 35년 전의 일을 회상하며 다시 부탁드렸더니 김주연 문학평론가도 흔쾌히 허락했죠."하고 말했다.

최근에야 시인은 시 속에서 고국과의 화해를 이뤄냈다. 지난해 국적을 회복한 후 쓴 시 '국적회복'엔 마음의 응어리가 일부라도 풀린 홀가분함이랄까, 기쁨이 담겼다.

"내가 미워했던 고국이여,/ 잘못했다. 긴 햇수가 지나도/계속 억울하고 서러웠다./치욕의 주먹이 미칠 것 같은/머리와 목덜미를 치고/내 앞길에 대못을 박았다./더 이상은 선택이 없었다.(중략)그러나 나는 믿었다./물고기는 물고기끼리/낙타는 낙타끼리/나비는 나비끼리/그리고 사람은 사람끼리/언젠가는 서로 화해한다./그 따뜻한 속내만을 믿었다./누구에게도 손 내밀지 않았다."라고 시인은 노래하고 있다.

그가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해 회한에 차서 수없이 뇌까렸을 '너무 늦었다'는 말까지 이젠 그를 괴롭히지 않는다. 시인은 시 마지막에 "너무 늦었다는 말까지/나를 그냥 가볍고 푸근하게 해주었다.'고 말한다.

서러움과 그리움 만큼 그의 시를 채우고 있는 것은 생명에 대한 소중함과 인간의 고통에 대한 위로다. 그는 의사로서의 그의 삶이 이같은 시를 쓸 수 있게 한 것 같다고 말했다. 반대로 시를 쓰는 그의 삶은 의사로서의 그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유색인 의사로서 미국에서도 자리잡고 학교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문학을 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의사들은 마약이나 술 등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데 제가 강한 사람이 못되면서도 그런데 빠지지 않은 것은 문학과 예술 전반에 대한 취미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반면 제 시가 사람들을 위로하고 따뜻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이 어쩔 수 없이 겪을 수 밖에 없는 고통과 죽음을 가까이서 보는 의사였고 그를 위로하고 극복토록 하는데 관심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마종기 시인에게 마지막으로 젊은 시인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마종기 시인은 문학과 지성사가 자신에게 읽으라고 보내주는 시집들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면서 "내가 왜 시인이며 시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시는 자신이 깨달은 인생의 진실을 담고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성찰하는 것인데 많은 젊은 시인들이 '멋을 부립니다'. '깊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왜 시인이며 시를 써야 하는지 생각해보면 자연히 이런 시는 안써야겠다, 이런 시를 쓰겠다 하는 게 드러나지 않을까요."하고 말했다.

Posted by 한글사랑(다향)

이별은 차마 못했네

 

                                   박노해

 

 

사랑은 했는데

이별은 못했네

 

사랑할 줄은 알았는데

내 사랑 잘 가라고

미안하다고 고마웠다고

참 이별은 못했네

 

이별도 못한 내 사랑

지금 어디를 떠돌고 있는지

길을 잃고 우는 미아 별처럼

어느 허공에 깜박이고 있는지

 

사랑은 했는데

이별은 못했네

 

사랑도 다 못했는데

이별은 차마 못하겠네

 

웃다가도 잊다가도

홀로 고요한 시간이면

스치듯 가슴을 베고 살아오는

가여운 내 사랑

 

시린 별로 내 안에 떠도는

이별 없는 내 사랑

안녕 없는 내 사랑

 

 

 

 

한 때 이 시인을 좋아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브르조아지적 노동꾼으로 익숙해질 무렵에

나 역시 같은 입장으로 동일 선상에 서 있으면서도

그래도 나보다 한 발 앞서 있었던 사람들은 그대로 이기를 바라는 욕심이었습니다.

 

그러다 세월호 사건을 마주하면서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아내듯 그렇게 보내다

이 시를 다시 만나게 되었고 내 마음을 그대로 전해보는 시로 옮겨 놓습니다.

 

세월호 아이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노란 리본을 달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그 아이들의 명복을 빌 수 밖에 없는 이 참담함을 ... ... .

 

한없이 부끄럽고 더군다나 무기력한 어른이라 더 미안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제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절대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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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시인의 마음이 되어보지만

이렇게 '잊지 않겠다 ' 다짐을  해놓고서도 벌써 일년지났습니다.

 

변한건 하나도 없고 관련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뻔뻔해졌는데

가장 뻔뻔했던 사람은 외국으로 잠시 이곳을 비워 둔답니다. 

원래 이해되지 않아고, 이해할 수도 없었지만

이렇게 마지막 기대까지도 무참히 짓밟아버리는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 여행지의 주인이 아무리 촌 무지렁이 가아 물을 것입니다.

이런 날에 집을 비워두고 오셨습니까? 그냥 뜻만 전해도 충분했는데요라고

아마 아주 정중하지만 완곡하게 되묻지 않을까요?

 

일년이 지난 지금 또다시 같은 마음이 되어봅니다.

 .

Posted by 한글사랑(다향)

 

 

시를 읽다 보면 시의 배경 보다는

문득 어느 한구절에 사로 잡히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이 시도 그러한 시의 하나입니다.

시의 배경은 광주 민중 항쟁을 겪고서 운주사를 들리면서

담담히 적은 글중에 해남대흥사 기행이 들어가 있습니다.

절집에 들어서기 전 생각과 느낌부터 차근차근 ...

 

어찌되었든 그가 느낀 마음을 시로 표현한 것인데

그 배경은 쏙 빼고 이 구절만 남습니다.

이럴 때 시인에게 미안해지기도 하지만

 

어찌 피는 꽃만이 아름다웠으랴
어찌 지는 꽃이 슬프기만 했으랴

 

다시 보다도 아름다운 싯구 입니다.

 

 

 

 

어찌 지는 꽃이 슬프기만 했으랴


                                                  임동확

삶이 먼저냐, 길이 먼저냐
채 따지기도 전에 취재차는
들을 지나고 내를 건너
해남 대흥사의 피안교를 지난다
그렇듯 사는 일이
다 의미있는 것만은 아니다
어떤 여인은 시퍼렇게 멍든 눈자위를 가린 채
일주문을 지나가고
또 어떤 자는 관광객으로
정진교를 생각없이 건너간다
일찍이 불과 바람과 바람의 화를,
전쟁과 병과 굶주림의 삼재를 면하려
제 유품을 이곳에 맡겼다는
어느 노승의 지혜란 것도
알고 보면 그런 것
해탈문을 해탈하고 지나간 자가
과연 얼마나 되었으며
눈알 부라리는 사천왕문을 짐짓 모른 채
스쳐간 자는 또 얼마던가
모든 행함이 이와 같으니
어찌 피는 꽃만이 아름다웠으랴
어찌 지는 꽃이 슬프기만 했으랴
그러나 막막한 물음으로 무거워진 천길 벼랑 위
그만 움쭉달싹 못 하고 주저앉듯
붉은 동백꽃이 진다
군사용 작전도로를 따라
문이란 문을 한꺼번에 통과해온
상상봉 저편
구름다리 근처에 새겨진 키 큰 마애불
연거푸 '거기 진불이 있느냐'
되묻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도 누구 하나 못 나서자
화난 부처 그냥 돌아서려는데
그때 동자승으로 변한
십육나한 하나
쪼르르르 오솔길로 달려간다
그 속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진불암 토안 스님
시주 들어온 푸른 수박 한 통 쪼개
붉은 속마음마저 다 보여주고

Posted by 한글사랑(다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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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일상을 통해 사람사는 이야기와 함께, 항암 관련 투병기록 및 관련 정보 공유를 통해 치유에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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