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다 보면 시의 배경 보다는

문득 어느 한구절에 사로 잡히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이 시도 그러한 시의 하나입니다.

시의 배경은 광주 민중 항쟁을 겪고서 운주사를 들리면서

담담히 적은 글중에 해남대흥사 기행이 들어가 있습니다.

절집에 들어서기 전 생각과 느낌부터 차근차근 ...

 

어찌되었든 그가 느낀 마음을 시로 표현한 것인데

그 배경은 쏙 빼고 이 구절만 남습니다.

이럴 때 시인에게 미안해지기도 하지만

 

어찌 피는 꽃만이 아름다웠으랴
어찌 지는 꽃이 슬프기만 했으랴

 

다시 보다도 아름다운 싯구 입니다.

 

 

 

 

어찌 지는 꽃이 슬프기만 했으랴


                                                  임동확

삶이 먼저냐, 길이 먼저냐
채 따지기도 전에 취재차는
들을 지나고 내를 건너
해남 대흥사의 피안교를 지난다
그렇듯 사는 일이
다 의미있는 것만은 아니다
어떤 여인은 시퍼렇게 멍든 눈자위를 가린 채
일주문을 지나가고
또 어떤 자는 관광객으로
정진교를 생각없이 건너간다
일찍이 불과 바람과 바람의 화를,
전쟁과 병과 굶주림의 삼재를 면하려
제 유품을 이곳에 맡겼다는
어느 노승의 지혜란 것도
알고 보면 그런 것
해탈문을 해탈하고 지나간 자가
과연 얼마나 되었으며
눈알 부라리는 사천왕문을 짐짓 모른 채
스쳐간 자는 또 얼마던가
모든 행함이 이와 같으니
어찌 피는 꽃만이 아름다웠으랴
어찌 지는 꽃이 슬프기만 했으랴
그러나 막막한 물음으로 무거워진 천길 벼랑 위
그만 움쭉달싹 못 하고 주저앉듯
붉은 동백꽃이 진다
군사용 작전도로를 따라
문이란 문을 한꺼번에 통과해온
상상봉 저편
구름다리 근처에 새겨진 키 큰 마애불
연거푸 '거기 진불이 있느냐'
되묻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도 누구 하나 못 나서자
화난 부처 그냥 돌아서려는데
그때 동자승으로 변한
십육나한 하나
쪼르르르 오솔길로 달려간다
그 속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진불암 토안 스님
시주 들어온 푸른 수박 한 통 쪼개
붉은 속마음마저 다 보여주고

Posted by 한글사랑(다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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