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5. 29. 19:30 좋아하는 시
마종기 시인 그리움과 서러움에서 고국과의 화해로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인이라서 옮겨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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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인터뷰]마종기 시인 그리움과 서러움에서 고국과의 화해로
(뉴스코리아 News1, 2015-05-29)
마종기 시인 © News1
5년만에 신작시집 펴내
(서울=뉴스1) 권영미 기자 = "자유가 무엇을 주었냐고 하면 몸 떨리는 외로움이라고 말할밖에 없다. 세상을 떠돌던 그 허름한 나그네가 무엇을 주었냐고 하면 소리 죽인 울음만 쌓여 목이 쉬었다는 말. 그러나 고국을 떠난 깨끗한 영혼이 깨어 있었기에 더 할 말이 없냐고 물어본다면 힘차고 거침없었다는 말을 보태고 싶다."('어머니, 자유, 9월의 긴 여행,' 중에서)
마종기(76) 시인은 맑고 따뜻하며 때로 서늘한 시어로 그리움과 외로움을 노래하는 시인이다. 1966년 한국을 떠난 후 수십년간 미국에서 의사로 살아왔기에 '정들면 고향이지'하는 말처럼 서러움도, 그리움도 잦아들만 하지만 그의 시는 시종일관 결핍과 그리움을 토로해왔다.
28일 문학과 지성사 건물내 한 카페에서 만난 마종기 시인은 왜 그리도 고국을 그리워했냐는 질문에 "1960년대 오하이오 주의 데이튼, 컬럼버스같은 중소도시(시인이 처음 정착했던 곳)는 쌀이나 배추 파는 데도 없고 한인도 별로 없던 곳이었죠. 부모형제와 떨어지고 벗들과도 만날수 없었던 데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식에도 갈 수 없었던 처지가 서러웠던 것 같습니다. 또 편도로 끊고 온 550달러나 되는 거금의 비행기 삯도 매달 갚아야 했고 자동차도 없이 살아야 했던(미국 중소도시는 자동차가 없으면 물 한 병 사러 나갈 수도 없다.) 가난도 향수의 한 원인이었던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1959년 연세대 의과대학 재학중에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마종기 시인은 의대 졸업 후 공군 군의관으로 군무하다가 1965년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에 문인 105명과 서명했다. 그는 이 때문에 방첩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출국을 조건으로 겨우 풀려나 1966년 미국땅으로 떠났다. 그로부터 4개월 후 동화작가인 아버지 마해송은 작고했지만 쫓겨난 몸인 아들은 장례식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일간지 기자로 일하던 동생은 남북대화 국면에서 이산가족인 큰아버지의 편지를 몰래 북의 기자를 통해 전해주다 해직된다. 생계가 막막해 동생은 미국의 형을 찾아왔고 10여년 후 자신이 운영하던 잡화점에서 강도에게 목숨을 잃는다. 결국 고국의 정치상황은 마종기 시인의 인생에서 많은 것을 앗아간 게 됐다.
5공화국은 다시 그의 시집에 생채기를 남겼다. 1980년에 나온 그의 시집 '안보이는 사랑의 나라'(문학과 지성사)에서 해설을 쓴 김주연은 3~4편의 시를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그 중 2편은 시집에 수록되지 못했다. 군부정권이 빼버린 것이다.
시인은 "아직도 그 시들이 왜 빠져야 했는지 모릅니다. '동장 아저씨를 인민군들이 총살했다' 같은 시구가 있었는데 그게 문제가 됐는지..."하고 중얼거렸다. 문학과 지성사는 김주연의 해설을 수정없이 그대로 내보냈고 이후 정권이 바뀌었지만 2편의 시를 다시 넣지 않았다. '상처받은 시집'의 상흔을 그대로 유지한 것이다.
시인은 지난 26일 아버지 마해송의 전집 10권을 완간했고 자신의 열한 번째 신작 시집 '마흔두 개의 초록'(문학과지성사)도 펴냈다. 이 시집의 해설 역시 김주연 평론가가 썼다. 마종기 시인은 "70대 나이의 평론가가 해설을 쓰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지만 35년 전의 일을 회상하며 다시 부탁드렸더니 김주연 문학평론가도 흔쾌히 허락했죠."하고 말했다.
최근에야 시인은 시 속에서 고국과의 화해를 이뤄냈다. 지난해 국적을 회복한 후 쓴 시 '국적회복'엔 마음의 응어리가 일부라도 풀린 홀가분함이랄까, 기쁨이 담겼다.
"내가 미워했던 고국이여,/ 잘못했다. 긴 햇수가 지나도/계속 억울하고 서러웠다./치욕의 주먹이 미칠 것 같은/머리와 목덜미를 치고/내 앞길에 대못을 박았다./더 이상은 선택이 없었다.(중략)그러나 나는 믿었다./물고기는 물고기끼리/낙타는 낙타끼리/나비는 나비끼리/그리고 사람은 사람끼리/언젠가는 서로 화해한다./그 따뜻한 속내만을 믿었다./누구에게도 손 내밀지 않았다."라고 시인은 노래하고 있다.
그가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해 회한에 차서 수없이 뇌까렸을 '너무 늦었다'는 말까지 이젠 그를 괴롭히지 않는다. 시인은 시 마지막에 "너무 늦었다는 말까지/나를 그냥 가볍고 푸근하게 해주었다.'고 말한다.
서러움과 그리움 만큼 그의 시를 채우고 있는 것은 생명에 대한 소중함과 인간의 고통에 대한 위로다. 그는 의사로서의 그의 삶이 이같은 시를 쓸 수 있게 한 것 같다고 말했다. 반대로 시를 쓰는 그의 삶은 의사로서의 그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유색인 의사로서 미국에서도 자리잡고 학교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문학을 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의사들은 마약이나 술 등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데 제가 강한 사람이 못되면서도 그런데 빠지지 않은 것은 문학과 예술 전반에 대한 취미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반면 제 시가 사람들을 위로하고 따뜻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이 어쩔 수 없이 겪을 수 밖에 없는 고통과 죽음을 가까이서 보는 의사였고 그를 위로하고 극복토록 하는데 관심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마종기 시인에게 마지막으로 젊은 시인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마종기 시인은 문학과 지성사가 자신에게 읽으라고 보내주는 시집들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면서 "내가 왜 시인이며 시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시는 자신이 깨달은 인생의 진실을 담고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성찰하는 것인데 많은 젊은 시인들이 '멋을 부립니다'. '깊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왜 시인이며 시를 써야 하는지 생각해보면 자연히 이런 시는 안써야겠다, 이런 시를 쓰겠다 하는 게 드러나지 않을까요."하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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