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가수 송창식과 늘 함께 나오는 기타리스트 ... 본인도 최고의 테크니션 기타리스트이면서도 늘 함춘호를 앞세운다
그의 가시나무를 아쿠아스틱으로 연주하는 음을 들어보라. 반하지 않을 수 없다.
자세히 보니 나와 갑장이며 생일이 5일 빠르다.
하단의 그의 인터뷰와 고백을 자세히 들어보기를 희망한다. 왜 유명한 가수들이 늘 그와 함께 공연하기를 원하는지...
함춘호 1961년 8월5일생으로 예원중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하던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기타를 시작하였고, (송창식의 기타연주와 노래에 반하여 기타를 시작함) 고3이던 1980년에 가수 전인권을 만나 그룹 '전인권과 함춘호'라는 그룹으로 잠시 듀엣을 하면서 대중음악인의 길로 나섰다. (이 때 처음으로 송창식과는 또 다른 가수가 있다는 걸 깨달음과 동시에 자신이 직접 노래를 부르는 것에 한계를 느껴 좌절을 겪으면서 세션 기타리스트로 최고가 되기로 방향을 전환한다.) 1984년 하덕규가 이끌던 포크록 그룹 시인과 촌장에 합류하였고, 2집 음반 《푸른 돛》의 참여하면서 기타리스트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1986년에 발매된시인과 촌장 2집 《푸른 돛》은 2007년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의 14위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조용필, 양희은, 송창식, 김현식, 신승훈, 임재범, 윤종신, 박정현, 보아 등 유명 가수들의 앨범과 라이브 세션으로 참여하면서 최정상급 기타리스트로 이름을 알렸다.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30여년 동안 꾸준히 활동하면서 많은 음악인들과 제작자에게서 인정받는 대중 음악계의 거장으로 손꼽히고 있다. 함춘호의 연주는 리프(Riff:반복선율)를 두 번 반복하지 않는다는 점과 다른 연주자들에게서 볼 수 없는 독특하고 따뜻한 느낌을 구현한다는 점에서 가장 큰 장점으로 여긴다. 2014년 현재, 서울신학대학교 실용음악과 교수 재직중이며, 대중음악인 단체인 한국 소리모음회(한국연주자협회) 회장과 기독음악인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다.
은퇴하면 봉사하는 활동에 시간을 내어야겠다고 뒤로 미뤄뒀는데 막상 퇴직을 하고보니 이제 현실적으로 육체적인 봉사는 어렵게 되었다. 역시 무슨일이든 마음먹으면 뒤로 미루지않고 쇠뿔도 단김에 빼듯 바로 실천해야지, 바쁘다고 뒤로 미루다보면 이런 경우가 허다하게 발생한다.
그나마 오랫동안 그리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두어군데 소액이나마 꾸준하게 기부를 해온 단체가 있다. 엊그제 그 중 한 곳에서 안정족인 보금자리를 마련했다는 기쁜 소식지를 보내왔다.
그 내용을 읽어보다가 그 보금자리 마련 이전에 34년 동안 13번 이사를 하면서 겪었던 사연들이 적혀있었다. 이사하는 날 시설 현황을 보고 바로 방을 빼달라거나, 얘기가 잘되어 이사하려는데 계약을 물려달라는 등의 그동언 겪었던 어려움들이 묻어 있었다.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드디어 보금자리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이제 이사에 대한 걱정거리 하나가 사라졌다는 얘기는 남의 얘기가 아닌 나의 어린시절 기억이기도 하다. 나의 어린 시절에 겪었던 집없는 설움, 더 나아가 아이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주인에게 당한 설움으로 어머니의 남몰래 숨죽여 우는 것을 몇차례 모른척하고 지켜보아야 했던, 셋방살이의 설움 그대로였다.
국민학교 입학전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광주의 변두리로 어머니, 나, 그리고 동생 둘이랑 함께 이사를 왔다. 지금 어머니께서 사시는 곳에서 3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으로 (이상하다. 어디선가 첫 삶의 터를 잡으면 쉽사리 그곳을 못 떠난다. 나도 직장따라 서울에 처음 정착한 곳애서 근 15년을 셋집살이로 맴돌았으니 ) 이사온 첫날밤 방틈새로 스며든 연탄가스로 온식구가 거의 죽다가 살아났다. 그때 옆집의 아주머니가 주신 동치미 국물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당시 연탄가스 마시면 동치미 국물을 마시게 하는게 민간 요법이었다. 그래서 그 집을 떠나 같은 동네로 옮겼다. 아이들 셋의 영향으로 몇달 못살고 쫓겨나다시피 이사를 했다. 이번에는 조금 멀리 떨어진 곳으로 집을 얻을 때 아이는 나혼자인 것 처럼 하고 식구수를 줄여 집을 얻고서 이사를 했다. 이사 당일에 나만 함께 이사를 하고 두 여동생은 밤늦게 데려왔다. 결국 며칠 지나지 않아 주인댁에서 알게되어 그에 대한 잔소리를 했는데 이사가라는 말은 없었다. 주인집에도 아이들이 다섯명이나 되어서인지 이해를 해주었고 또래들이어서 조금씩 나아졌고 거기서 네째가 태어났다. 물론 아이들이 떠들면 떠든다고 주인댁에서 싫은 소리를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 주인은 양반에 가까웠다.
우여곡절 끝에 두어차례 더 이사를 했고(부엌도 없던 행랑채 비슷한 곳에 수돗물도 없이 옹달샘물을 먹던 준 산골집도 거쳤다 ) 그 사이에 네째가 태어났고, 마지막으로 지금 집에서 막내 여동생이 태어났다. 그집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땀으로 지은 집이다. 산밑 산번지의 땅을 사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매일 새벽에, 일을 마친 저녁에 땅을 파서 평지로 메꾸는 작업을 했고 당신의 직업을 살려 비록 무허가지만 방세칸을 뚝딱 지었다. 이사를 마친 다음날 어머니는 그날 처음으로 발뻗고 편히 주무셨다 했다. 그 뒤로도 집 뒷편을 파내는 작업이 계속되었고 근 일년만에야 터다운 집이 되었다. 그 사이 상하방 한칸을 더 달아냈고 두어번 축대가 무너져 고생하기도 하셨다. 그래서인지 방을 세내어줄 때 아이들 많은 걸 가리지 않고 세를 내어줬고 그뷴들과 사이좋게 살았던것 같다. 지금도 우리 집을 거쳐간 분들과 왕래도 하고 애경사도 챙기고, 모임도 하는걸 보면 ....
이야기가 다소 다르게 흘렀다.
봉사 이야기를 하고싶었는데... ... 이제는 육체적 봉사는 엄두를 낼 수 없을 것 같아서 아쉽고 씁쓸하다. 은퇴를 하면 이런저런 봉사를 해야지하고 염두에 둔 봉사는 이제 물건너 간 셈일까?
아직도 난 그 희망을 버리지는 않는다.
년말, 성탄절이 다가오자 그 기부 단체에서 감사의 인사와 함께 안부를 물어온다.
내가 드리는 기부액이야 소액이지만 그 분들에게는 큰힘이 되었으면 하는 욕심을 내어본다.
어렸을 때 미국 한 할머니에게 매달 5달러씩 후원받은 어느 분의 이야기다. 그 분 역시 그 도움을 잊지않고 페루의 아이들을 계속 후원하고 있다.
기부나 봉사활동을 망설이는 이들에게 그는
“중간에 후원을 멈추면 아이들이 상처받을까 봐 걱정하는 사람도 많은데 일단 한 번이라도 해보길 권한다”며 “망설이면 아무것도 안 된다. 작아 보이는 5달러나 2만~3만원이 누군가에게는 잊을 수 없는 ‘장난감 기차’나 ‘만년필’처럼 작은 기적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세종=뉴시스] 임재희 기자 = 국민 28명당 1명은 암 진단을 받고 살아가는 암 유병자로 나타났으며 이 중 5년 넘게 생존해 사실상 완치 판정을 받은 환자가 처음으로 100만명을 넘어섰다. 평생동안 암에 걸릴 확률은 35.5%였다. 남성은 위암, 폐암, 대장암 환자가 많았고 여성은 유방암, 갑상선암, 대장암 순으로 많이 발생했다. 해외 주요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암 발생률은 낮고 생존율은 높았다.
◇암 유병자 187만명 중 5년 생존자 104만명 24일 보건복지부와 중앙암등록본부 등이 발표한 '2017년 국가암등록통계'에 따르면 전국 단위 암 등록 통계를 산출하기 시작한 1999년 이후 2017년까지 암 확진 후 치료 중이거나 완치된 암 유병자는 186만7405명(지난해 1월1일 기준)이었다. 2017년 우리나라 전체 인구(5123만712명) 대비 3.6%로 국민 28명 중 1명은 암 유병자에 해당했다. 남자는 3.2%, 여자는 4.1%였다. 특히 65세 이상 암 유병자는 82만 6103명으로 전체 65세 이상 국민(706만 6203명)의 11.7% 수준이었다. 노인 9명당 1명이 암 유병자란 뜻이다. 암종별로는 남녀 모두 갑상선암 유병자가 가장 많아 전체의 21.7%(40만 5032명)를 차지했다. 다음으로 위암(28만9223명), 대장암(25만1063명), 유방암(21만7203명), 전립선암(8만6435명), 폐암(8만4242명) 순이었다. 암 진단 후 5년 초과 생존한 암환자는 103만9659명으로 전체 암 유병자의 절반이 넘는 55.7%였다. 처음 50%대를 넘어선 2016년 91만6880명보다 늘어 첫 100만명대에 진입했다. 추적 관찰이 필요한 2~5년 암환자는 44만6428명(23.9%), 적극적 치료가 필요한 2년 이하는 38만1318명(20.4%)였다. 생존율도 높아지고 있다. 최근 5년간(2013~2017년) 발생한 암환자의 5년 상대생존율은 70.4%로 10년 전인 2001~2005년 54.1%보다 1.3배(16.3%포인트) 향상됐다. 위암(18.5%포인트), 간암(15.1%포인트), 폐암(13.7%포인트), 전립선암(13.1%포인트) 등을 포함해 주요 암종에서 이전 5년보다 상대생존율이 증가했다. 암종별 생존율로는 갑상선암(100.1%), 전립선암(94.1%), 유방암(93.2%)의 생존율이 높았으며 간암(35.6%), 폐암(30.2%), 담낭 및 기타담도암(28.9%), 췌장암(12.2%)의 생존율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이처럼 생존율이 높아진 데 대해 국립암센터 이은숙 원장은 "치료 성적이 굉장히 좋아진 게 큰 이유"라며 "조기 검진으로 조기에 발견되는 환자가 늘어나면서 치료가 잘돼 병을 잘 완치한 환자들이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들어 여성 유방암 환자가 늘어난 것과 관련해선 "여성들이 사춘기 때 한창 자랄 때 무엇을 먹느냐가 암 발생률과 관련이 있다"며 "유방이 사춘기 때 발육하는데 그때 먹는 게 나중에 유방암에 영향을 미친다는 건 꾸준히 인정되고 있다"고 말했다. ◇신규 암환자 중 위암 가장 많고 폐암·췌장암 증가 2017년 한 해 새로 발생한 암 환자는 남자 12만2292명, 여자 10만9963명 등 총 23만2255명으로 집계됐다. 2016년 23만1236명 대비 1019명(0.4%) 증가했다. 가장 많이 발생한 암은 위암으로 2만9685명 발생했으며 대장암(2만8111명), 폐암(2만6985명), 갑상선암(2만6170명), 유방암(2만2395명) 순이었다. 2016년과 비교했을 때 암종별 발생자 수는 남녀를 통틀어 폐암이 3위, 췌장암이 8위로 각각 한 단계씩 높아졌고 남자, 여자 각각에서 상위 6개 암의 순위에는 변동이 없었다. 남자는 위암, 폐암, 대장암, 전립선암, 간암, 갑상선암 순이었고 여자는 유방암, 갑상선암, 대장암, 위암, 폐암, 간암 순이었다. 암 발생률을 연도별로 비교하기 위해 연령표준화발생률(2000년 주민등록연앙인구 기준)로 환산하면 인구 10만명당 암 환자는 282.8명으로 전년 대비 6.6명(2.3%) 감소했다. 1999년 이후 2011년까지 연평균 3.7%씩 증가하다가, 2011년 이후 매년 약 2.6%씩 감소하고 있다. 다만 유방암, 전립선암, 췌장암, 신장암은 1999년 이후 발생률이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는 반면 위암, 대장암, 갑상선암, 폐암(남자), 간암, 자궁경부암의 발생률은 최근 감소 추세를 보였다. 인구 고령화 등으로 암 환자 자체는 늘고 있지만 이를 표준화해 암 질환 발생률 자체를 비교해 보면 상대적으로 암 발생률이 줄어들고 있다는 얘기다. 실제 세계표준인구로 보정한 우리나라 암발생률은 인구 10만 명 당 264.4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301.1명)보다 낮은 수준이다. 이에 비해 최근 OECD 자료에 따르면 국가암검진사업 대상 암종인 6대암(위암, 대장암, 간암, 유방암, 자궁경부암, 폐암)의 2010~2014년 5년 순 생존율은 같은 기간 미국, 영국, 일본 등보다 높은 수준이었다. ◇내년 암관리종합계획 수립…암데이터 사업 본격화 이날 복지부는 국가암관리위원회를 '2017년 국가암등록통계'와 함께 '2020년 국가암관리사업 주요 추진과제' 등도 논의했다. 복지부는 5년마다 암관리법에 따라 수립하는 암관리종합계획 제4차(2021~2025년)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제3차 종합계획(2016∼2020년)의 성과를 평가하고 국내외 암관리 최신 동향을 반영해 미래 과제 등을 발굴하고 있다. 제4차 종합계획은 내년 하반기 국가암관리위원회 심의를 거쳐 최종 발표할 예정이다. 아울러 내년에는 올해에 이어 만 50~74세 남녀 5000명을 대상으로 대장암 검진 시 대장내시경 검사를 1차 검사로 도입하는 방안에 대한 시범사업을 계속 진행한다. 암데이터 사업도 본격화한다. 국민건강보험공단,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국립암센터, 질병관리본부 등에 분산된 암 관련 데이터를 가명 처리 후 수집·연계·활용하는 사업이다. 복지부 김강립 차관은 "암 조기검진, 치료기술 발달 등으로 전체적인 암 생존율이 증가해 암 생존자의 관리 및 사회복귀 지원이 날로 중요해지고 있다"며 "암데이터 사업을 통해 난치성 암 등에 대한 진단 및 치료기술 개발 등 근거기반 정책과 연구개발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limj@newsis.com
어제 4년동안 살던 대산 사택에서 서울로 이사를 했다. 근 세달간 하나 하나 옮기는 짐의 부피를 줄이는 짐 정리를 했고 그중 한달은 나름 포장분류를 했다. 가구류와 침구류등은 다 버렸다. 장식장2. 옷장. 식탁. 화장대. 침대와 소파들이 간택을 받지 못했다. 물론 책 수백권과 아껴모아 CD장 두개와 별도 박스에 보관중인 영화와 음악 및 다큐 CD등도 재활용 쓰레기로 버려졌다. 다행히 새것이나 다름없는 세탁기만 새 주인을 찾아 떠났다.
조촐하게 냉장고와 내 책상만 살아남은 셈이다. 아내가 세달 동안 심적 고통에 육체적 고생을 했다.
드디어 가족 네식구가 한살림으로 합쳐졌다.
가족은 한집에서 사는 것이고 식구는 한 식탁에서 함께 식사하는 것 이라는 법정스님의 말씀이 다시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