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20.01.14 어머니가 상경하셨다. 5
  2. 2019.11.26 올 한해 가장 아쉬웠던 점.
  3. 2019.10.28 미사중 눈물
  4. 2019.09.08 오늘은 내 생일.
  5. 2018.10.26 눈물

 

이번 설 명절에는 광주 본가에 내려갈 수 있을까 하는 질문 속에 상상만으로도 스스로 내려가는 그림을 자주 그리곤 했다. 아니 늘 그리고 있었다.

그러다 이번주 주말에 서울에 두 딸이 살고있어 그나마 서울에 자주 올라오게되는 세째 여동생이 어머니의 반 성화(?)에 못이기는 척 겸사겸사 KTX 편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올라온 것이다.

사실 어머니를 뵐 기쁨보다도 걱정이 앞섰다. 야윌때로 야윈 내 모습을 다른 이들에게는 보여줘도 어머니에게만큼은 보여주기 싫었다.
내 모습을 보시고 실망할 그 모습을 생각만 해도 늘 눈물이 났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몇달만에 어머니를 직접 뵈었다. 어머니가 나를 보자마자 마치 오랫만에 만난 연인처럼 나를 꼬옥 안고서 어쩔줄 몰라하셨다. 그래도 난 그 순간만큼은 어머니의 눈길을 애써 피했다.
어머니 역시 내 맘을 아시는 지 예전과 달리 내 얼굴을 만지시기만 하고 계셨다.
기특하게도 조카들도 주말임에도 함께 해주었다.
집근처의 바다라는 식당에서 아구찜과 해물탕을 시켜서 푸짐하고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해물텅이 좀 빈약했지만 가성비 대비로 보면 그래도 솔솔하다

저녁에 아내랑 어머니는 와인 한잔.
좋아하시는 피자는 어머니도 과식으로 뒤로 미뤘다.

저녁에 이런저런 얘기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

그러다 얘기중에 갑자기 내 눈물보가 터졌다
소리를 죽이려 이를 악물었음에도 엉엉 소리가 잇몸새로 새어나왔다.
어머니도 결국 우셨다. 아내도 옆에서 운다.
그리곤 지나가듯 어머니에게 말한다.

"어머니 어머니 오시면 어머니 품에서 엉엉 울고 싶었대요"

어머니께서 갓 부화한 새끼를 품에 안듯 나를 꼬옥 안으시면서 이제 우리 그만 울자. 아들 눈물 흘리지 않도록 서로 노력하자고 하셨다.

 

다음날 너무 좋지않은 미세 먼지로 강화도로 가려던 일정을 뒤로 미루고 집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차한잔 나누신 후 아내가 용산역까지 모셔다 드리고 다시 광주로 향하신다.

1박2일 어머니의 아들집 방문이 끝났다.

이제 여윌대로 여윈 내 모습을 보셨으니 체력이 허락하는 한 광주에 자주 다녀올 생각이다.

일주일 지나서 명절에 못내려가서 죄송하다고하고
아버지 기일에 내려가겠다고 했다.
그 때 건강하게 보자고 하시면서 미처 끊지 못한 스마트폰 너머로 울음소리가 들리는듯했다 .
환청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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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한글사랑(다향)

사무실에서 송년회를 준비하면서 촬영을 한단다.

일곱가지 설문에서 제비뽑기를 하는데
뽑아넣고 보니 그 제목이 내게 딱 맞다.

   "올 한해 가장 아쉬웠던 점."

촬영을 하는데 만감이 교차했다.
그래서일까?
아무 말없이 카메라만 응시하다가
인터뷰를 중단하자고 했다

계속 진행하면 눈물이 날것 같았다.

굳이 그런 영상으로 송년회를 망치고 싶지도 않고 내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올 한해를 되돌아 보면
가장 큰 아쉬움은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음에도
할 수 없었던 아쉬움이 가장 크다.

내 의지의 부족함도 한몫했지만

그러나 가장 큰 아쉬움은
감사할 일로 진 빚이 너무나 크다는 것이다.

일년이 넘도록 투병생활을 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빚진게 너무나 많음에도
어쩌면 그 빚을 하나도 갚지 못할 것 같아서...
이런 생각만으로도 눈물이 난다.

눈물이 났다.
요즘 눈물이 잦아졌다.
마음이 약해진 것도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다.
굳이 애써 부정하고 싶지도 않다.

30년이 넘게 다녔던 회사생활을
이제는 년말에 마감하려고 한다.
정년까지는 아직 3년이 남았지만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어쩌면 내 자신을 위해서도
직장생활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이미 마무리 결정을 내렸음에도
삼십년생활을 하루 아침에 정리한다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다
하루에도 열두번씩 왔다갔다 한다
그래도 마지막 결론은 변하지 않는다

12월초에 광주 본가에 내려가 어머니를 뵐 계획이다.
일주일에 두어번 이상 통화를 하면서도 막상 찾아뵙지를 못했다.

그건 바짝 마른 내 모습을
어머니께 보여드리기는 솔직히 싫었다
그리고 더 큰 걱정은
어머니앞에서 눈물을 보일것 같아서이다.

그런 내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다.
그래도 보고 싶은걸 어찌할까
어머니 품에서 서럽게 울고 싶은걸 어이할까?

밤이 어둠 속으로 서서히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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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한글사랑(다향)
 어제 청년미사에 참례했다.
평소 교중미사에 참례했는데 그동안 신앙생활에 냉담했던 아이들이 쳥년 성가대에 봉사를 하면서 아내랑 함께 미사시간을 옮긴 것이다. 가능하면 온 가족이 함께 미사봉헌울 하고, 아이들을 격려하고자 시간대를 옮긴 것이다. (참고로 서대문구 가재울 성당 청년미사는 일요일 오후 6시 시작이고, 청년 성가대는 찬양준비차 오후 4시5분에 모여 연습을 한다.)

아마도 녀석둘이 냉담에서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한 가장 큰 이유는
나(녀석들에게는 아빠)의 항암투병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더해지는 간절함과 기도를 드리고,
온가족이 함께 미사에 참례하면 좋겠다는 내 바램에 부응하고자하는 마음이 시작의 첫출발이었을게다.

미사가 끝나면 성가대 특송의 녹음 파일을 가족 톡에 올려, 다시 듣곤한다.

아주 작아보이지만 이 역시 하느님이 내게 보내주신 선물의 하나로 늘 내게 김사하는 마음을 불러 일으켜준다.

어제는 약 두어달 전에 병자성사를 해주셨던 보좌신부께서 알아보시고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라고 묻는다.
 
아마도 지난주에 아내 혼자 참례한 것을 기억하시나보다.
아내는 "많이 좋아졌다." 고 밝게 미소와 함께 답례를 한다.
신부님께서 미소와 함께, 기도 많이 하고 있으며 계속 기도 하겠다는 말씀에 가벼운 목례와 함께 고맙다고 답례 인사를 했다.

오늘 성체성사로 예수님의 성체를 모신 후에 성가대 특송과 함께 나도 모르게 계속 눈물이 흘렀다. 평소와 달리 눈물이 주르룩하고 볼을 타고 흘러 내혔다.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여러번 훔친다.

미사를 마친 후 집으로 오는 길에 아내가 묻는다.

"왜 울었냐?"고

딱히 이유없이 그냥 마음이 동해 나도 모르게 흐른 눈물이라 답을 하지않고 그냥 웃기만 했다.

아내가 어찌 내 마음을 모르겠는가?
답없는 미소에 아내의 손이 내 손을 꼭 잡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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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한글사랑(다향)
작년 생일날 입원하여 곧바로 암환자가 되었다
올해는 생일 하루전 고열로 응급실에서 일반 병실이 없어 응급단기병동에 있다.

어제 모친께서 생일 축하 전화를 하셨다.
혹시나 내일 내 생일날 오전에 놓칠까봐 하루전 전화를 주신 것이다.

59년 동안 한차례도 빼지않고 같이 살 때는 조촐한 생일상에 분가 후에는 늘 전화를 넣어주셨다. 생알을 맞이한 사람이 낳아주신 어머니께 감사인사를 하는게 도리라는 글을 읽은 후, 아주 간혹 내가 모친께 고맙다고 따로 인사를 드리기도 했지만 그건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이다.

그날은 다행히 어디냐고 묻지 않으셨다.
나도 병원이라고 굳이 말씀드리지 않았다.
혹여 말씀드리면 당신 마음을 더 아프게 하실까 봐서...

7월부터 반복된 일상 하나가 생겼다.
주말에 입원해서 2주를 병원에서 보낸 후 퇴원을 한다.
그리곤 어김없이 퇴원한 그주말에 고열로 응급실행. 그리고 위의 일상이 반복되고 있다.

긴 여정의 끝이 보이는듯인 하다.

그동안 암환자이면서도 아닌척 보내고 있었다. 몸은 환자지만 마음은 환자가 아니었다. 변함없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었기도 하고 일상생활에서 환자아닌 일반인보다 더 생생했다.  그러다가 언젠가 부터 응급실행이 많아지면서 그 주기는 갈수록 짧아지고 있다. 더하여 먹는 알약의 종류와 갯수가 하나씩 계속 더해지고 있다.

이제서야 내가 암환자라는 걸 실감한다.

나도 모르게 그동안 암환자라는 걸 전혀 못 느끼던 마음까지 스스로 암환자라는 색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이미 물들여진 색을 지워내려면 상당한 노력이 생각이상으로 필요할게다.

병실에서 내려다 본 연세대 신촌캠퍼스.
Posted by 한글사랑(다향)

2018. 10. 26. 10:54 NEW (항암 치료기)

눈물

내게도 이렇게 많은 눈물이 어디에 숨어 있었을까?
환자복을 입고 있어서 더 센치해진걸까?

난 아들 하나에 아래로 여동생만 다섯이다.
바로 아래 동생과 네살 터울이니 지금이야 같이 늙어가지만
어린시절 내가 고1 때 그 동생이 초등학교 5학년이니
그걸로 보면 꽤 큰 터울이다.
세째 동생부터는 어머니까지 일을 나가셔서 학교 수업이 파하면 내가 동생들을 돌보았다. 무릎에 눕혀 한쪽 무릎으로 움직이면서 놀리고 한편 손으로는 책을 읽었나보다.지금도 그시절 내 모습을 얘기하시는 분들이 계신다. 물론 어머니 친구분들이시지만..
그래서 내 어린 시절 별명이 '방안퉁수'와 '애늙은이 영감' 이었다.

여덟 식구를 아버지 혼자 감당하시기에는 집안 형편이 넉넉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어려운 형편에 난 대학을 가고 밑의 큰 여동생은 야간 상고를 선택허게 되었다. 공부는 하고싶고  주간에 다닐 형편이 못되니 주간에 돈을 벌면서 공부를 하려고 야간상고에 진학을 한것이다. 그나마 쥐꼬리 봉급에 학비등으로 빠듯했을 것인데도 본인은 직장에 다닌다고 가난한 대학생 오빠에게 도움을 주곤했다.
지금도 잊을 수없고 그 동생을 보면 늘 그때가 생각난다.

아버지는 속깊으시면서도 사랑을 표현할 줄 모르시는 무뚝뚝한 전형적인 한국의 아버지셨다.

빈손으로 화순에서 가족을 고향에 남겨 두시고 홀로 광주로 오셔서 군대 공병대에서 배운 목수 기술로 터전을 잡으신 후 이년만에 다섯 식구를 광주 단칸방으로 부르셨다.
이후 어려운 형편에 혼자 일곱 식구를 부양하셨기에 울 틈도 없으셨다고 내게 말씀하셨다.

난 아버지의 눈물을 세번 보았다.
아버지 고향 친구이자 의형제인 도균이 삼촌이 돌아가셨을 때(그 분을 만날 때면 꼭 내 손을 잡고 다니셨다. 약속이라고 했다)
아버지 바로 아래 동생이 젊은 나이에 나이어린 조카들을 남겨두고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와
당신이 중환자실에서 나와 필담을 나누실 때 딱 세번이었다.

그런 영향이었을까?
감성이 여린 나도 자연스레 남자가 우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면 쩨쩨하고 지는걸로 알았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면서도 울지않았다.
내 울음소리에 당신이 더 슬퍼질까 봐 그리고 마음 여린 어머니 마음을 더 상하게 할까봐 장례를 치루는 내내 눈물 한방울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삼우에서 그 동안 밀린 울음을 참고 참았던 눈물과 함께 마음껏  소리내어 엉엉 울었다.
가족들이 깜짝 놀랬다.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장에서
입술을 굳게 다물고 눈물 한방울 보이지 않는 나를 보고 독하다고 했단다. 어찌 아버지를 여의고 슬프지 않을 아들이 어디 있겠는가?

그랬던 내가 자주 눈물을 보이자

아내가 놀린다.
"이렇게 마음이 약해져서야..."

하기야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눈물이 나면 아닌 척 눈물 감춘 적이 많았으니...

그래도 쉬 눈물을 보이지 않았는데
요즘은 어떤 생각 하나만 해도
눈물이 저절로 흐른다.

어젠 목소리를 최대한 가다듬어
평소처럼 모친께 전화를 드렸다.

모친께서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아들 목소리가 듣고 싶다고 했단다.
평소와 달리 이십여일 째 전화를 못걸었다.
기력이 없는 내 목소리를 통해서
행여나 모친께서 눈치채실까 봐
그 동안 전화를 걸 수 없었다.

끊고 한참을 속으로 울었다.

속으로 속으로 감춘 눈물이 저절로 넘쳐 눈가로 방울져 떨어졌다.
마음속 울음 소리조차도 가슴을 통해 함께 떨리고 밖으로 울리고 있었다.

아내가 내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이제야 내가 나를 다독인다.

   「눈물 보이는 게
      결코 약하다거나
      지는게 아니란다.」

밤 하늘이 차갑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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