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26. 10:54 NEW (항암 치료기)
눈물
내게도 이렇게 많은 눈물이 어디에 숨어 있었을까?
환자복을 입고 있어서 더 센치해진걸까?
난 아들 하나에 아래로 여동생만 다섯이다.
바로 아래 동생과 네살 터울이니 지금이야 같이 늙어가지만
어린시절 내가 고1 때 그 동생이 초등학교 5학년이니
그걸로 보면 꽤 큰 터울이다.
세째 동생부터는 어머니까지 일을 나가셔서 학교 수업이 파하면 내가 동생들을 돌보았다. 무릎에 눕혀 한쪽 무릎으로 움직이면서 놀리고 한편 손으로는 책을 읽었나보다.지금도 그시절 내 모습을 얘기하시는 분들이 계신다. 물론 어머니 친구분들이시지만..
그래서 내 어린 시절 별명이 '방안퉁수'와 '애늙은이 영감' 이었다.
여덟 식구를 아버지 혼자 감당하시기에는 집안 형편이 넉넉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어려운 형편에 난 대학을 가고 밑의 큰 여동생은 야간 상고를 선택허게 되었다. 공부는 하고싶고 주간에 다닐 형편이 못되니 주간에 돈을 벌면서 공부를 하려고 야간상고에 진학을 한것이다. 그나마 쥐꼬리 봉급에 학비등으로 빠듯했을 것인데도 본인은 직장에 다닌다고 가난한 대학생 오빠에게 도움을 주곤했다.
지금도 잊을 수없고 그 동생을 보면 늘 그때가 생각난다.
아버지는 속깊으시면서도 사랑을 표현할 줄 모르시는 무뚝뚝한 전형적인 한국의 아버지셨다.
빈손으로 화순에서 가족을 고향에 남겨 두시고 홀로 광주로 오셔서 군대 공병대에서 배운 목수 기술로 터전을 잡으신 후 이년만에 다섯 식구를 광주 단칸방으로 부르셨다.
이후 어려운 형편에 혼자 일곱 식구를 부양하셨기에 울 틈도 없으셨다고 내게 말씀하셨다.
난 아버지의 눈물을 세번 보았다.
아버지 고향 친구이자 의형제인 도균이 삼촌이 돌아가셨을 때(그 분을 만날 때면 꼭 내 손을 잡고 다니셨다. 약속이라고 했다)
아버지 바로 아래 동생이 젊은 나이에 나이어린 조카들을 남겨두고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와
당신이 중환자실에서 나와 필담을 나누실 때 딱 세번이었다.
그런 영향이었을까?
감성이 여린 나도 자연스레 남자가 우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면 쩨쩨하고 지는걸로 알았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면서도 울지않았다.
내 울음소리에 당신이 더 슬퍼질까 봐 그리고 마음 여린 어머니 마음을 더 상하게 할까봐 장례를 치루는 내내 눈물 한방울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삼우에서 그 동안 밀린 울음을 참고 참았던 눈물과 함께 마음껏 소리내어 엉엉 울었다.
가족들이 깜짝 놀랬다.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장에서
입술을 굳게 다물고 눈물 한방울 보이지 않는 나를 보고 독하다고 했단다. 어찌 아버지를 여의고 슬프지 않을 아들이 어디 있겠는가?
그랬던 내가 자주 눈물을 보이자
아내가 놀린다.
"이렇게 마음이 약해져서야..."
하기야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눈물이 나면 아닌 척 눈물 감춘 적이 많았으니...
그래도 쉬 눈물을 보이지 않았는데
요즘은 어떤 생각 하나만 해도
눈물이 저절로 흐른다.
어젠 목소리를 최대한 가다듬어
평소처럼 모친께 전화를 드렸다.
모친께서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아들 목소리가 듣고 싶다고 했단다.
평소와 달리 이십여일 째 전화를 못걸었다.
기력이 없는 내 목소리를 통해서
행여나 모친께서 눈치채실까 봐
그 동안 전화를 걸 수 없었다.
끊고 한참을 속으로 울었다.
속으로 속으로 감춘 눈물이 저절로 넘쳐 눈가로 방울져 떨어졌다.
마음속 울음 소리조차도 가슴을 통해 함께 떨리고 밖으로 울리고 있었다.
아내가 내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이제야 내가 나를 다독인다.
「눈물 보이는 게
결코 약하다거나
지는게 아니란다.」
밤 하늘이 차갑게 다가왔다.
환자복을 입고 있어서 더 센치해진걸까?
난 아들 하나에 아래로 여동생만 다섯이다.
바로 아래 동생과 네살 터울이니 지금이야 같이 늙어가지만
어린시절 내가 고1 때 그 동생이 초등학교 5학년이니
그걸로 보면 꽤 큰 터울이다.
세째 동생부터는 어머니까지 일을 나가셔서 학교 수업이 파하면 내가 동생들을 돌보았다. 무릎에 눕혀 한쪽 무릎으로 움직이면서 놀리고 한편 손으로는 책을 읽었나보다.지금도 그시절 내 모습을 얘기하시는 분들이 계신다. 물론 어머니 친구분들이시지만..
그래서 내 어린 시절 별명이 '방안퉁수'와 '애늙은이 영감' 이었다.
여덟 식구를 아버지 혼자 감당하시기에는 집안 형편이 넉넉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어려운 형편에 난 대학을 가고 밑의 큰 여동생은 야간 상고를 선택허게 되었다. 공부는 하고싶고 주간에 다닐 형편이 못되니 주간에 돈을 벌면서 공부를 하려고 야간상고에 진학을 한것이다. 그나마 쥐꼬리 봉급에 학비등으로 빠듯했을 것인데도 본인은 직장에 다닌다고 가난한 대학생 오빠에게 도움을 주곤했다.
지금도 잊을 수없고 그 동생을 보면 늘 그때가 생각난다.
아버지는 속깊으시면서도 사랑을 표현할 줄 모르시는 무뚝뚝한 전형적인 한국의 아버지셨다.
빈손으로 화순에서 가족을 고향에 남겨 두시고 홀로 광주로 오셔서 군대 공병대에서 배운 목수 기술로 터전을 잡으신 후 이년만에 다섯 식구를 광주 단칸방으로 부르셨다.
이후 어려운 형편에 혼자 일곱 식구를 부양하셨기에 울 틈도 없으셨다고 내게 말씀하셨다.
난 아버지의 눈물을 세번 보았다.
아버지 고향 친구이자 의형제인 도균이 삼촌이 돌아가셨을 때(그 분을 만날 때면 꼭 내 손을 잡고 다니셨다. 약속이라고 했다)
아버지 바로 아래 동생이 젊은 나이에 나이어린 조카들을 남겨두고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와
당신이 중환자실에서 나와 필담을 나누실 때 딱 세번이었다.
그런 영향이었을까?
감성이 여린 나도 자연스레 남자가 우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면 쩨쩨하고 지는걸로 알았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면서도 울지않았다.
내 울음소리에 당신이 더 슬퍼질까 봐 그리고 마음 여린 어머니 마음을 더 상하게 할까봐 장례를 치루는 내내 눈물 한방울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삼우에서 그 동안 밀린 울음을 참고 참았던 눈물과 함께 마음껏 소리내어 엉엉 울었다.
가족들이 깜짝 놀랬다.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장에서
입술을 굳게 다물고 눈물 한방울 보이지 않는 나를 보고 독하다고 했단다. 어찌 아버지를 여의고 슬프지 않을 아들이 어디 있겠는가?
그랬던 내가 자주 눈물을 보이자
아내가 놀린다.
"이렇게 마음이 약해져서야..."
하기야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눈물이 나면 아닌 척 눈물 감춘 적이 많았으니...
그래도 쉬 눈물을 보이지 않았는데
요즘은 어떤 생각 하나만 해도
눈물이 저절로 흐른다.
어젠 목소리를 최대한 가다듬어
평소처럼 모친께 전화를 드렸다.
모친께서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아들 목소리가 듣고 싶다고 했단다.
평소와 달리 이십여일 째 전화를 못걸었다.
기력이 없는 내 목소리를 통해서
행여나 모친께서 눈치채실까 봐
그 동안 전화를 걸 수 없었다.
끊고 한참을 속으로 울었다.
속으로 속으로 감춘 눈물이 저절로 넘쳐 눈가로 방울져 떨어졌다.
마음속 울음 소리조차도 가슴을 통해 함께 떨리고 밖으로 울리고 있었다.
아내가 내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이제야 내가 나를 다독인다.
「눈물 보이는 게
결코 약하다거나
지는게 아니란다.」
밤 하늘이 차갑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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