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전등사를 다녀와서

먼저 오래전 글을 옮겨왔다는 점 이해해 주시길...

2004.05.20 21:00 다향 한글사랑 

서울로 올라 와서 좋은 점을 고르라면
저 아래 남도에 살면서 거리를 핑게로 가 보지 못했던 곳이나
다시 가 보고 싶은 곳을 애써 멀리해야 한다는 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 일게다.

그런데도 막상 서울로 올라 오니
그것 또한 생각과 달리 만만하지 않았다.
물론 여수에 있을 때 보다는 멀리 떠나는 횟수는 줄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는 많이 가 본 것은 사실이기는 하다.

지난 선거일에는 일찍 선거를 마치고 강화도 전등사엘 다녀왔다.

서울와서 한강 다음으로 간 곳이 인천 영종도와 강화도 마니산이었으니
그 동안 강화도는 몇 번 들렸지만 전등사는 먼 곳의 상상이었다.

서울로 되돌아가는 길의 밀리는 교통지옥을 아래 살 때에는 상상도 못했을 그 이상을 넘어서는 것이기에 웬만한 인내로는 넘기 힘든 벽이 되었다.

광성보, 초지진, 덕포진,등
그래도 갈만한 곳은 다 들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초지진대교가 완공되어 강화 쪽으로 가는 국도의 국 심한 교통 체증을 피하면서 여유롭게 짧은시간에도 다녀올 수 있기에
그동안 미뤄두었던 전등사를 들렸다.

고구려때 고승 아도 화상이 창건하여 1266년 고려 원종 7년에 중창했다는 절. 전등사.

멀리 보성 문덕의 대원사도 아도화상이 지었다는데

그 시대 스님들은 절만 짓다가 세월을 다 보냈나 보다.

전등사 대웅전은 보물 178호로 1615년 조선 광해왕 7년에 다시 지경화상이 기공하여 1621년에 완성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본 건물 위 추녀 끝에 나열된 보주와 귀기둥 제공 위에 조각된 인형물과 내부 불단상에 건조된 닷집이 풍부하고 다채롭게 투각한 장식과 부룡 , 극락조등은 다른 건물에서 볼 수 없는 것으로 조선 중기의 특이한 대표적인 건물의 하나로 탱화가 없는 소박미를 보여 준다.


어디서나 마찬가지이지만 절 뒷편의 오르막에서 내려다 보는 절집은 항상 아늑하면서 묘한 조형미를 갖는다.

혹시 절에 들리면 절 뒷편의 조금 높은 곳에서 가람의 배치와 조형들을 살펴보기를 권한다.

기대 이상으로 많은 것을 느끼고 편안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전등사는 혹시 크기를 기대하고 간다면 알려진 이름에 비해 초라할 정도로 아담스러워 실망일게다

더하여 이 곳에서는 반드시 전등사 외부 성곽 위를 거닐어 보기를 ... 
그러면 걷는 동안에 천연 요새지에 자연을 그대로 이용한 성곽의 지혜와 함께 자신도 모르게 소단해질 것이다.

아이들을 남겨두고 아내랑 둘이서만 잠시 다녀온 전등사

차 한 잔의 여유처럼 아름다웠다.

비록 아늑하고 아름다운 죽림다원 차를 마시지는 못했지만

[ 강화도 정족산 전등사(傳燈寺)소개 ]

대웅전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성(鼎足山城)내에 있는 사찰.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에는 강화도의 주봉을 이루는 마니산이 있고 이 산의 한 줄기는 북동쪽으로 뻗어 길상면 온수리에 이르러 다시 세 봉우리를 형성하였는데 이것이 정족산이다.

전등사는 바로 이 정족산성 내에 있는데, 1977년에 복원된 삼랑성의 남문이 현재 전등사의 출입문으로 이용되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傳燈本末寺誌}에 전등사창건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제 1편 1장의 전등사지에 의하면 이절이 본래 고구려 소수림왕11년(381)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개산(開山)하고 진종사라 이름붙였다하고,

그뒤 고려 원종7년(1266)에 사승(寺僧)이 이 절을 다시 창건하였다 한다.

그러나 강화도가 고구려영토가 되는것은 소수림왕11년보다 거의 1백년이 지난뒤인 장수왕 63년 (475)의 일이다.

아직 백제에는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해오지도 않았는데(384년에 전해옴) 백제영토인 강화도에 절이 세워졌다는것은 아마 후세 사람들이 잘못 윤색해 놓은 허구일 것이다.

다만 원종7년(1266)의 중창기사는 믿을만하다고 보아지며 (동국여지승람)권12, 강화 전등사조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원 세조(元世祖) 지원(至元)19년, 즉 충렬왕8년(1282)에 충렬왕 원비(元妃) 정화궁주 (貞和宮主) 왕(王)씨가 승려 인기(印奇)를 시켜 바다를 건너 송(宋)에 들어가서 대장경을 인쇄해 이절에 보관하게했다는것이다.

그리고 {江華府志}에서는 부처님 앞에 불을 밝히는 옥등잔도 역시 정화궁주가 보시(布施)한것이라고 했는데

{전등본말사지}에서는 옥등잔을 헌납함으로써 절 이름을 고쳐 전등사라 사액(賜額)하였다고 일컫고있다.

그 뒤 1337년(충숙왕 복위 6년)과 1341년(충혜왕 복위 2년) 이 절의 승려들이 중수하 였다.

1605년 (선조 38년) 불이 나서 전체 건물의 반 가량이 타버렸고, 1614년 (광해 군 6년) 12월 또다시 불이 나서 나머지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이듬해 4월 지경(志敬) 등이 중심이 되어 재건을 시작하여 1621년 2월 옛 모습을 되 찾았다.

1678년(숙종 4년) 조정에서 실록을 이곳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사고(史庫)를 지키는 사찰로서 조선왕실의 비호를 받게 되었고,

 1707년 유수(留守) 황흠(黃欽)이 사각 (史閣)을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翠香堂)이라 이름하고 보사권봉소(譜史權奉所)로 정하였으며,

1719년 이 절의 최고승려에게 도총섭(都摠攝)이라는 직위 를 부여하였는데, 이는 1910년까지 계속되었다.

1726년(영조 2년) 영조가 이곳에 와서 취향당의 제액(題額)을 써주고 고쳐 걸게 하였 으며, 1734년 곡식 수십석을 하사하였다.

또한 1749년 2월 이 절의 중수불사(重修佛 事)가 당시의 총섭 초충(楚充)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는데,

중수에 쓰인 재목의 대부분은 영조가 시주한 것이며, 이때 대조루(對潮樓)도 함께 건립되었다.

또한 1761년 대연(大演)이 법당의 삼존불을 개금(改金)하였다. 1784년(정조 8년) 정 족창(鼎足倉)이 세워졌는데, 규모가 4,5칸에 불과하였으나, 1828년(순조 28년) 양곡 5,000석을 보관할 수 있는 40 - 50칸으로 확장되어 시설절목(施設節目)까지 마련되었다.

1839년(헌종 5년) 서룡(瑞龍)을 비롯한 14명의 승려가 시왕전(十王展)을 수리하고 담장 등을 보수하였다.

1841년 연홍(演弘) 등이 대조루를 중건하였고, 1855년(철종 6년) 규영(奎榮)등이 대웅전을 중수하였으나 이때 경제적으로는 큰 어려움에 빠져 있었다.

1871년(고종 8 년) 포량고(砲糧庫)를 이 절에 건설하였고, 1872년 승군 50명과 총섭 1명을 두고 진상약애고(進上藥艾庫)와 산성별장소(山城別莊所)를 절 남쪽에 건설하였으며,

1876년 에는 효월(孝月)이 대웅전과 약사전을 중수하였다. 1884년 3월 영담(映潭)이 관음암 을 중수하였고,

1905년 주지 서룡이 비로전의 불상과 약사여래 및 칠성탱(七星撑)을 개금불사(改金佛事)하였으며,

1909년 오랫동안 이 절에 보존되었던 사고장본(史庫藏本)을 서울로 옮겼고,

1910년 당시의 군수 한영복이 이 절에 전래되어오던 유물인 동향로를 궁내부에 바쳤다.

1912년 조선불교 30본산의 하나로서 강화, 개성 등 6개군에 소재하는 34사찰을 관리하는 본산으로 승격되었다. 초대주지는 김지순이었고, 2대주지는 국창환이었다.

1915 년 국창환은 국고보조를 얻어 대웅전을 중수하였고, 1916년 신도들의 기부금으로 시왕전과 대조루 등의 건물을 중수하였다.

1928년 3대 주지 이지영이 지장상(地藏像)을 개금하고 명부전을 다시 세우는 한편 적뭉당 30여칸을 수리하고, 식당 26탄의 기와를 바꾸는 대불사를 이룩하였다.

1932년 6대 주지 이보인이 국고보조금과 신도의 기부금으로 대웅전과 극락암을 중수하고, 적묵당, 강설당, 대조루, 명부전, 극락암 등을 중건하였으며,

8대 주지 김정섭은 1934년 전문강원(傳門講院)을 설립하고 안진호에게 부탁하여 사료를 모아 {전등본말사지(傳燈本末寺誌})를 편찬, 발행하였다.

이 절의 가람배치는 전형적인 산지가람의 배치를 따르고 있다. 출입문을 들어서면 바로 양헌수 장군 승전비가 서있고 약간 경사진 산길을 따라 오르면 북쪽으로 대조루에 오르는 계단이 보인다. 절 입구의 대조루를 지나면 정면 남향한 대웅전이 있고 그 주위에는 약사전, 명부전, 삼성각, 향로각, 적묵당, 강설당, 범종각 등이 있다.

보물 제179호인 약사전 내부에는 선정인(禪定印)을 취한 약사여래가 봉안되어 있으 며,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서 내부에는 지장보살살을 비롯한 10구의 시왕(十王), 2구의 귀왕(鬼王), 2구의 판관(判官), 2구의 녹사(錄事), 2구의 장군(將軍), 10구의 동자(童子) 등 29구의 존상이 있고,

1884년에 조성된 후불탱화가 있다.이밖에 향로전은 대웅전의 분수승(焚脩僧)이 거처하는 곳이고,

적묵당과 강설당은 본 래 대웅전에서 서로 마주보는 위치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두 건물은 선원(禪院)과 강원(講院)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중요 유물로는 보물 제393호인 범종과 법화경판이 있다. 범종은 우리나라 종과는 그 형태가 판이한 중국종으로서, 민족항일기 말기의 군수물자 수집공출 때에 빼앗겼으 나, 1945년 광복과 함께 부평에서 발견되어 다시 이 절로 돌아오게 되었다.

또한 법 화경판은 귀중한 장경판으로서 본래 105매 였으나, 1매는 6.25사변 때 파주의 모부대에서 가져갔다고 한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거대한 청동수조와 옥등이 있다. 청동수조의 유래는 잘 알 수 없으나 산화된 상태로 보아 고려시대의 유물로 보이며, 옥등은 대웅전 안에서 불을 켜던 것이다.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1호인 대조루에는 선원보각(瑄源譜閣), 장사각(藏史閣), 취향당 등의 편액이 남아 있고,

사찰 경내에는 70여년 이래로 은행이 한톨도 열리지 않았다고 전하는 수령 600년의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 삼랑성 전설 ] 사적 130호
강화도 남단 정족산 산등성이를 따라 단군의 세 아들 부소(扶蘇), 부우(扶虞), 부여(扶餘)가 쌓았다는 삼랑성(三郞城)이 있고, 전등사는 이 삼랑성 품속에 고즈넉하게 안겨 있다. 전설의 땅 강화도(江華島), 그 남단에 정족산(鼎足山)이란 산이 있고, 산등성이를 따 라 성(城)이 있으니, 이를 이름해 삼랑성(三郞城)이라 한다.
 
  2002. 12. 25
Posted by 한글사랑(다향)
백제 짚신 ‘ 볍짚 아닌 부들’로 제작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m
2004.6.20

백제 짚신은 일반적인 볏짚이 아니라 강변에 자생하는 여러해살이 풀인 부들(Typha)로 만들어졌으며, 형태도 전통적인 우리나라 짚신과는 달리 신발 바닥만 있는 구조로 일본 현대 짚신과 유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고대에 짚신 제작기술이 백제에서 일본으로 전해졌음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김용민)는 이같은 내용을 담은 연구보고서 ‘백제의 짚신’을 최근 발간했다. 책은 부여문화재연구소가 지난 1995년 이후 발굴해온 부여 궁남지유적(사적 135호)과 관북리백제유적(사적 428호)에서 출토된 백제짚신 64점의 분석을 통해 삼국시대 우리 조상이 신고 다녔던 신발과 관련된 생활문화의 한 면을 살펴본 기획·연구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백제 짚신의 출토현황에서부터, 짚·풀 문화의 민속학적 특징,짚신 유물의 과학적 보존처리 방법, 재질에 대한 과학적 분석결과 등을 담고 있다.

이번 연구에서 우리 현대 짚신같이 신바닥 앞에 세운 새끼 기둥인 앞총이 없이 가는 당김잇줄로만 묶은 백제 짚신은 신발 바닥만 있는 구조였음이 밝혀졌다. 인병선 짚풀생활사박물관장은 책에 실린 ‘백제 짚신의 특징’이란 글을 통해 “백제 짚신은 현대의 신발처럼 신을 신는 것이 아니라 풀이나 나무껍질로 발을 묶어싸던 원시적인 형태에서 조금 발전한 형태였던 것으로 생각된다”고 밝혔다. 

특히 신라 짚신도 앞총은 없지만 형태면에서는 우리 현대 짚신과 흡사한 반면, 백제 짚신은 일본 짚신과 유사해 일본문화의 뿌리가 된 백제문화와 삼국통일 후 확실히 우리문화의 뿌리로 자리잡은 신라문화의 역사적인 궤적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고 인 관장은 설명했다.재질면에서도 백제 짚신의 재료로 쓰인 부들은 현재 짚신의 주재료가 아니어서 부들 짚신은 백제 멸망후 전통이 단절됐을 가능성이 시사됐다. 거친 부들을 사용해 정교한 짚신을 제작한 것은 당시 사람들이 수준 높은 공예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란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문화일보
Posted by 한글사랑(다향)
 2003년 3월 말경에 다녀온 부여 여행에 대한 기록을 천리안 동호회 게시판에서 찾았습니다.

읽어보니 기억이 새롭습니다.   글 내용중에 있는 톨게이트에서의 일은 전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다른 내용은 다  새록 록 떠오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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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매일 늦은 탓에 아이들에게 미안함을 가져보지만

그마음 조차도 표현해줄 시간이 없다면...

아마도 아내는 최근들어 포기한 상태가 아닐까 합니다.

모처럼 여행을 다녀오자는 것에

아내랑 가까운 곳에 살짝 다녀온것은 지난 회사 창립기념일 이었습니다.

 

지난 일요일은 아름다운 백제를 만나러 부여를 다녀왔는데

아침 일찍 일곱시경에 나서기로 햇지만 조금 지난 일곱시 반에 집을 나섰습니다.

모처럼의 여행길!

이제는 습관처럼 인터넷을 뒤져 사전에 정보를 정리하고 문화유산 답사기 충남편을 뒤진 끝에 부여를 선택하었습니다.

아침일찍 출발할 때는 맑은 햇살을 가리울 정도로 적당하게 흐린 날씨는 도리어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 줍니다.

안산고속도로에서 안중으로 안중에서 안성으로 안성에서 천안을 거쳐 새로운 천안-논산 고속도로의 탄현나들목으로

톨게이트에서 있었던 작은 일 하나가 못내 가슴을 아프게하고 그로 인해 평상시 내게 감춰진 또 다른 모습에 한참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구불구불 시골 산길을 벗어나면서도 평소의 나를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습니다.

새벽처럼 나선 날이라 도중 기사 식당이 좋았지만 지나치고 만탓에

여행가면 식당고르는 게 고민이지요 더군다나 부여처럼 작은 도시는 더욱 그러합니다.

이때는 반드시 그도시에서 제일 큰 관공서주위를 가면 저렴하면서 깨끗한 식당이 많답니다.

공무원들이 자주다니는 탓에 ( 그 이유는 아시죠 ..요즘은 아니겠지만 )

역시 부여 군청 옆에서 저렴하게 맛잇는 늦은 아침을 먹었습니다.

군청에 들려 다시한번 관광안내지도 겸 자료를 얻고

 

무왕(서동왕자)의 아름다운 사연이 깃들어 잇는 [궁남지]로 향하였습니다.

최근들어 알려지기 시작한 곳 관광지를 들릴 때마다 비싼(?) 입장료에 한번 더 망설이는

서민의 비애를 말끔하게 씻어주는 곳 입장료 무료, 주차료 무료 ...

탁트인 평원의 궁남지

아이들은 선화공주와 서동왕자의 사연부터 시작해서..

아이들과 문화유산답사를 하면 이렇게 해달라고 제안을 합니다.

반드시 안내판을 소리내어 일게 하면 참좋습니다.

대부분 아이들의 관심은 겉모습에만 치우치고 자세한 것은 흘려 지나기 쉬운 까닭입니다.

광한루 처럼 세워진 높다란 그네. 거기서 아이들을 한번식 태워 줍니다.

 

처음으로 탄 여송이의 그네타는 방향이 반대여서 물었더니

[ 그네 타는 모습을 찍을 대 궁남지가 나오게 하려면 반대로 그네를 타야한답니다. ]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무엇이 좋은지 분간을 못하지만 반대로 생각할 수 잇다는것에 속으로만 박수를 보내었습니다.

궁남지에서 정림사지 오층석탑

주차료가 천원이라는 것을 알고 갔지만

주차장에 주차를 하는데도 아무런 통제가 없어써 공짜인줄 알았는데

매표소에 설치된 거울로 주차를 확인하여 주차료를 받더군요 ,

아마 이번 여행에서 가장 아까운 돈이었다면 아마도 이 주차료와 입장료가 아닐까합니다.

 

물론 정림사지는 아이들에게 좋은 유물이었습니다.

목탑의 유형으로 , 소정방의 백제 정복 기록의 아픈역사도 더하여 오늘은 아이들에게 탑의 층을 세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정확하게 배운 탓에 박물관등에서 보는 탑의 층수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것을 보면 아마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수확인 듯 합니다.

거기는 입장료는 반액에 주차는 공짜로 해도 충분할 것이라는 생각이 아직도 맴돕니다

( 아직도 난..... )

그다음 목적지는 백제박물관입니다.

참고로 여기는 주차장은 무료이며 입장료는 아시죠 아이들은 무료고 어른들만 저렴한 입장료라는 것을 더하여

향기진한 매화꽃이 우리마음처럼 밝게 피어 있고 샛노란 산수유에 하얀 목련은 봄꽃에 목말라하던 아내의 소원을 단번에 풀어주고 맙니다.

 

입구에서 아이들과 아내는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사러가고 난 가까운 정자에 잠시 햇빛을 피하는새

먼저와 계시던 연세드신 분들이 과일과 떡을 권합니다.  으례 습관처럼 사양을 하자 서운하신 듯한 말씀과 웃음으로

한곁에 붙어 떡을 먹고 과일을 먹고  따스한 우리민족을 느껴봅니다.

이내 그 분들의 젊은이들을 부러워하는 대화에  나도 이내 그 부러움에 빠져듭니다.

 

나이는 못속이나 봅니다.

어디가나 국긻 박물관은 비슷합니다. 다만 그지역에서 출토된 유적이기에 색다른 문화로 새로움에 빠져들곤 하지만

아이들은 항상 같은 표정에 같은 느낌이나 봅니다.

아이들에게 박물관에 또 오고 싶어하는 전시관이나 이베트가 있었으면 좋겠다느 생각을 다시 또 해봅니다.

 

이윽고 나선 부소산성

낙화암 가는 길에 새봄인데도 앙상한 낙엽이 달려잇는 나무는 이민족에 의해서

멸망한 백제의 서르픈 한처럼 느껴져서 못내 마음이 아팠습니다.

낙화암에 이르러 우스게로 말합니다.

[삼천궁녀가 자살하려 햇다면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줄지어서 기다려야 했을까..] 라는 말로

이래서 패자의 역사는 더욱 슬픕니다.

저 멀리 벌어지는 전쟁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얼마나 패자의 아픔을 견뎌낼 수 없었으면  이렇게 자살을 택해야 했을까

많이 좋아졌다 해도 전쟁은  아이들과 여자들에겐 더욱 고통스러고 슬픈 일입니다.

 

고란사에 들러 백제의 왕이 마셨다는 고란사의 약수르 마십니다.

옛날 그 왕들처럼 "고란초 하나를 띄우면 좋을 것을" 하는 생각도 해보고

아이들은 유난히 그 약수를 몇 잔씩 마십니다.

거기서 백마강을 거슬르는 유람선에 아이들과 몸을 싣었습니다.

일렁이는 파도는 역사의 흐름처럼 도도하고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소정방이 백마를 미끼로 백제르 ㄹ지키는 용을 낚았다는 조룡대와

그 앞을 노니는 이름모를 물새는 유구한 세월을 지켜주는 흔적같습니다.

낙화암을 지나면서 상상을 그려놓고 잠시 이생각 저생각을 하는데 벌써 목적지에 도착을 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그곳에서 차를 세워둔 곳으로 걷기를 십여분 서울로 오는 시간을 고려하여

유명하다는 식당엘 들렸습니다. 그 공원의 돌쌈밥집에서 ... 간판의 선전만큼이나 맛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여행에서는 동동주를 마셔야 더욱 더 운치가 있고 역사의 흐름에 뭄을 실을 수 있는데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여행에서는 그 기쁨을 잊은 지 오래입니다.

 

식사 후 근처의 조각공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산책을 하고

여송이는 박물관에서 부터 관심 많은 간석기(마제석기)를 만들어 박물관에 간석기를 발견했다고 신고를 해야한다는 둥

하나에 빠지면 다른 곳은 완전하게 관심 밖이 되는 특우의 성격을 이틈에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되돌아 오는 길에 어두운길에 두세번 되지만 아주 오래전 기억의 조그만 시골길이라 초행길처럼 가슴을 졸인 아내에게

조금은 미안함으로 다음은 약속대로 공주와 부석사를 약속하면서 글을 맺습니다.

 

아이들의 기록을 옮겨야되는데 미처 가져오지를 못해서.

참 가장기억에 남은 곳은 낙화암이 아닌 궁남지라는 것에 어른들은 이해가 가지만

아이들까지 그 곳이라는 사실에 긍남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백제의 수도로써 고작 90년 밖에 안되었지만

이민족에게 패망한 나라의 아픔은 더욱 유난히 크게 느껴지는 것은 또다른 아픔이었습니다.

 

문득 고창 선운사와 완주의 금산사가 머리를 내내 떠나지 않은 이유와 같을 지도 모릅니다.

한글사랑
 
               <12030401>
Posted by 한글사랑(다향)
오래전에는 매년 차를 만들려 보성으로 하동으로 봄철이면 다녔다. 가능하면 아이들이 어렸어도 온가족이 함께 제다를 했는데 몇년동안 멀어졌다.
하지만 마음만은 여전하다. 툭히나 허동은 우리나라 차시배지로 유명하고 보성과 대비되는 야생차개념이 강하다. 
 

 [투어코리아] 올해로 22회째를 맞는 경남 하동의 '하동 야생차 문화축제'가 오는 5월 19∼22일 차시배지 화개면악양면 일원에서 개최된다.

이번 축제의 모토는 '하동야생차, 세계중요농업유산 등재'로 정했다.

축제 슬로건은 하동 전통차 농업의 세계중요농업유산 등재에 걸맞게 '왕의 차! 세계로 나아간다'로 정하고, 세계인이 함께하는 글로벌 문화관광 차축제로 승화하기로 했다.

군은 이와 관련한 콘텐츠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하동녹차의 세계화와 대중화에 역점을 두겠다는 의지다.

▲ '하동야생차문화축제'가 오는 5월 19∼22일 차시배지 화개면악양면 일원에서 개최된다.

아울러 대표 프로그램의 영속성을 강화하고 지역주민과 가족 참여형, 그리고 교육체험형 프로그램을 대폭 확대할 방침이다.

이와 함께 차 생산 농가와 가공업체의 소득향상과 직결되는 소비판촉 프로그램을 적극 발굴하되 비주제성 프로그램과 주무대는 가급적 축소한다는 계획이다.

군은 이같은 축제의 기본방향을 바탕으로 지역민과 전문가 등의 의견을 적극 수렴해 세부적인 추진계획을 마련시행하기로 했다.

군은 또 축제의 효율적인 운영과 외국인의 통역 지원을 위해 3월 19일까지 일반 및 통역 자원봉사자 40여명을 모집한다.

▲ 차인한마당

모집 대상은 일반 봉사자의 경우 만65세 이하 누구나, 통역봉사자는 만18세 이상 영어일어중국어 가운데 1개 이상 통역이 가능한 사람이면 누구나 신청할 수 있다.

자원봉사자는 축제장을 찾는 관람객 안내와 함께 방문객 편의를 위한 종합안내소, 전시관, 체험시설 등에 배치돼 행사운영을 돕게 된다.

이번 축제 및 자원봉사자 모집과 관련한 자세한 사항은 군청 문화관광실 축제담당부서로 문의하면 된다.

하동야생차문화축제 바로가기
http://tour.hadong.go.kr/program/tour/tourfestival/outTourFestival.asp?cate=4
Posted by 한글사랑(다향)
아침에 티백으로 차를 우리는데 동료가 묻는다.

왜 티백으로 차를... ?

평소 나의 차 마시는 습관을 잘 알기에 궁금해서 물었을 것이다. 요즘들어 간단히 우려마실 차가 동났다. 예전처럼 개인 공간이 있으면 (보이)차를 내려놓고 마셨는데 이제는 그럴 형편이 못되어서 간편하게 티백으로 마시고 있다. 맹물 생수보다는 더 좋기 때문이다.

집에서는 홍차를 자주 우려마신다.
차는 보관이 생명인데 그나마 여건이 좋아서 여유있게 마시고 있는 것이다.

아래 홍차에 대한 정보가 있어서 함께 나눌려고 한다.

홍차, 알고보니 이렇게나 좋았다
 
 홍차는 전 세계 차 소비량의 75%를 차지할 만큼 인기가 많은 ‘차’(茶)다.

홍차는 찻잎을 따 발효하는 과정에서 카테킨이 산화돼 홍갈색을 띄게 된다. 말린 찻잎이 검은 빛깔을 띄기 때문에 서양에서는 이를 ‘블랙티(black tea)’로, 동양에서는 찻잎을 우린 색에 따라 ‘홍차’로 부르게 됐다.

원조 발효차의 하나인 홍차는 테아플라빈(theaflavin), 테아루비긴(thearubigin) 등의 항산화제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이 다양한 항산화 성분으로 인해 건강상 이점도 풍부하다. 

1. 당뇨병 위험 감소

해가 다르게 당뇨 위험이 높아지고 있다. 국내 당뇨병 인구는 2010년 201만명에서 2016년 251만명으로 5년 사이 25%나 급증했다. 홍차를 많이 마시면 당뇨병에 걸릴 위험성이 낮아진다.

스위스 제네바 소재 데이터 마이닝 인터내셔널사의 아리엘 베레스니아크 연구원은 세계 5대륙, 50개국의 2009년 홍차판매량과 암, 당뇨병 등 5가지 질병의 유병률에 관한 자료를 비교 분석했다. 그 결과 홍차 소비량은 호흡기질환, 전염병, 심혈관질환, 암, 당뇨병 등 5가지 질환 중에서 당뇨병 유병률과만 연관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다른 연구도 있다. ‘아시아ㆍ태평양 임상영양학 저널’(Asia Pacific Journal of Clinical Nutrition)에 실린 태국 마히돌대학 영양학 연구팀의 연구(2017)에선 홍차가 제 2형 당뇨병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결과를 얻었다. 홍차 속 폴리페놀이 달콤한 음식을 먹어도 당 수치가 급격히 오르는 것을 막아준다.

2. 동맥경화 위험 감소

홍차를 하루에 3잔 정도 마시면 죽상 동맥경화증의 위험이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메릴랜드 대학에서 진행한 연구(2004)에 따르면 홍차 속 산화방지제가 죽상동맥경화증을 일으키는 활성산소를 제거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에선 하루 3잔의 홍차를 마시니 죽상 동맥경화증의 위험이 11%나 감소한다는 결과를 얻었다.

죽상경화증은 혈관의 가장 안쪽을 덮고 있는 내막에 콜레스테롤이 침착하고 내피세포의 증식이 일어나 ‘죽종(atheroma)’이 형성되는 혈관질환을 말한다. 이는 관상동맥 심장 질환은 물론 만성 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유럽 임상영양학 저널’에 실린 연구(2006)에 따르면 하루 3잔의 홍차가 관상 동맥 심장 질환의 위험을 낮추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암 위험 감소

홍차는 암 발병 위험도 낮춘다. 미국 국립 암 연구소(National Cancer Institute)에 따르면 차에 들어있는 폴리페놀은 종양 성장을 억제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일부 연구에선 홍차가 전립선암, 폐암, 난소암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미국임상영양학저널(The American Journal of Clinical Nutrition)’에 실린 연구에서도 매일 마시는 홍차가 난소암 발병 위험을 낮추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25~55세 사이의 여성 17만 명을 대상으로 30년 동안의 식습관을 추적 조사했다. 연구 결과 홍차는 물론 감귤류와 주스, 사과, 레드와인 등을 통해 플라보노이드를 많이 섭취한 여성들은 난소암에 걸릴 가능성이 무려 31%나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4. 혈압 감소

홍차를 마시면 혈압을 낮추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2015년 이탈리아 라퀼라 대학에서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홍차는 고지방 식사를 섭취하는 사람들에게 혈압 감소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호주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대학 의ㆍ약학부의 조나산 M. 호그슨 박사 연구팀의 연구(2012)에선 35~75세 사이의 남녀 성인 피험자 95명에게 6개월간 하루에 3잔씩 홍차를 마시게 한 결과, 24시간 평균 수축기 혈압과 이완기 혈압이 평균 2~3% 포인트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5. 치매 예방

매일 마시는 홍차가 치매 발병 위험을 50%까지 낮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싱가포르국립대학교 연구팀이 55세 이상의 성인 957명을 대상으로 12년간 차 소비량 등을 조사한 결과, 홍차 등의 차를 꾸준히 마시는 사람은 치매 발병 위험이 50%까지 낮았다. 항염증 및 항산화 효과가 있는 카테킨과 테아플라빈 같은 홍차속 성분이 혈관 손상과 신경 퇴화로부터 뇌를 보호하는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shee@heraldcorp.com
리얼푸드 고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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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일상을 통해 사람사는 이야기와 함께, 항암 관련 투병기록 및 관련 정보 공유를 통해 치유에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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