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3. 10. 23:47 아름다운 문화(차와 문화)
강화도 전등사를 다녀와서. 2004.5.20
강화도 전등사를 다녀와서
먼저 오래전 글을 옮겨왔다는 점 이해해 주시길...
2004.05.20 21:00 다향 한글사랑
서울로 올라 와서 좋은 점을 고르라면
저 아래 남도에 살면서 거리를 핑게로 가 보지 못했던 곳이나
다시 가 보고 싶은 곳을 애써 멀리해야 한다는 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 일게다.
그런데도 막상 서울로 올라 오니
그것 또한 생각과 달리 만만하지 않았다.
물론 여수에 있을 때 보다는 멀리 떠나는 횟수는 줄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는 많이 가 본 것은 사실이기는 하다.
지난 선거일에는 일찍 선거를 마치고 강화도 전등사엘 다녀왔다.
서울와서 한강 다음으로 간 곳이 인천 영종도와 강화도 마니산이었으니
그 동안 강화도는 몇 번 들렸지만 전등사는 먼 곳의 상상이었다.
서울로 되돌아가는 길의 밀리는 교통지옥을 아래 살 때에는 상상도 못했을 그 이상을 넘어서는 것이기에 웬만한 인내로는 넘기 힘든 벽이 되었다.
광성보, 초지진, 덕포진,등
그래도 갈만한 곳은 다 들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초지진대교가 완공되어 강화 쪽으로 가는 국도의 국 심한 교통 체증을 피하면서 여유롭게 짧은시간에도 다녀올 수 있기에
그동안 미뤄두었던 전등사를 들렸다.
고구려때 고승 아도 화상이 창건하여 1266년 고려 원종 7년에 중창했다는 절. 전등사.
멀리 보성 문덕의 대원사도 아도화상이 지었다는데
그 시대 스님들은 절만 짓다가 세월을 다 보냈나 보다.
전등사 대웅전은 보물 178호로 1615년 조선 광해왕 7년에 다시 지경화상이 기공하여 1621년에 완성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본 건물 위 추녀 끝에 나열된 보주와 귀기둥 제공 위에 조각된 인형물과 내부 불단상에 건조된 닷집이 풍부하고 다채롭게 투각한 장식과 부룡 , 극락조등은 다른 건물에서 볼 수 없는 것으로 조선 중기의 특이한 대표적인 건물의 하나로 탱화가 없는 소박미를 보여 준다.
어디서나 마찬가지이지만 절 뒷편의 오르막에서 내려다 보는 절집은 항상 아늑하면서 묘한 조형미를 갖는다.
혹시 절에 들리면 절 뒷편의 조금 높은 곳에서 가람의 배치와 조형들을 살펴보기를 권한다.
기대 이상으로 많은 것을 느끼고 편안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전등사는 혹시 크기를 기대하고 간다면 알려진 이름에 비해 초라할 정도로 아담스러워 실망일게다
더하여 이 곳에서는 반드시 전등사 외부 성곽 위를 거닐어 보기를 ...
그러면 걷는 동안에 천연 요새지에 자연을 그대로 이용한 성곽의 지혜와 함께 자신도 모르게 소단해질 것이다.
아이들을 남겨두고 아내랑 둘이서만 잠시 다녀온 전등사
차 한 잔의 여유처럼 아름다웠다.
비록 아늑하고 아름다운 죽림다원 차를 마시지는 못했지만
[ 강화도 정족산 전등사(傳燈寺)소개 ]
대웅전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성(鼎足山城)내에 있는 사찰.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에는 강화도의 주봉을 이루는 마니산이 있고 이 산의 한 줄기는 북동쪽으로 뻗어 길상면 온수리에 이르러 다시 세 봉우리를 형성하였는데 이것이 정족산이다.
전등사는 바로 이 정족산성 내에 있는데, 1977년에 복원된 삼랑성의 남문이 현재 전등사의 출입문으로 이용되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傳燈本末寺誌}에 전등사창건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제 1편 1장의 전등사지에 의하면 이절이 본래 고구려 소수림왕11년(381)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개산(開山)하고 진종사라 이름붙였다하고,
그뒤 고려 원종7년(1266)에 사승(寺僧)이 이 절을 다시 창건하였다 한다.
그러나 강화도가 고구려영토가 되는것은 소수림왕11년보다 거의 1백년이 지난뒤인 장수왕 63년 (475)의 일이다.
아직 백제에는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해오지도 않았는데(384년에 전해옴) 백제영토인 강화도에 절이 세워졌다는것은 아마 후세 사람들이 잘못 윤색해 놓은 허구일 것이다.
다만 원종7년(1266)의 중창기사는 믿을만하다고 보아지며 (동국여지승람)권12, 강화 전등사조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원 세조(元世祖) 지원(至元)19년, 즉 충렬왕8년(1282)에 충렬왕 원비(元妃) 정화궁주 (貞和宮主) 왕(王)씨가 승려 인기(印奇)를 시켜 바다를 건너 송(宋)에 들어가서 대장경을 인쇄해 이절에 보관하게했다는것이다.
그리고 {江華府志}에서는 부처님 앞에 불을 밝히는 옥등잔도 역시 정화궁주가 보시(布施)한것이라고 했는데
{전등본말사지}에서는 옥등잔을 헌납함으로써 절 이름을 고쳐 전등사라 사액(賜額)하였다고 일컫고있다.
그 뒤 1337년(충숙왕 복위 6년)과 1341년(충혜왕 복위 2년) 이 절의 승려들이 중수하 였다.
1605년 (선조 38년) 불이 나서 전체 건물의 반 가량이 타버렸고, 1614년 (광해 군 6년) 12월 또다시 불이 나서 나머지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이듬해 4월 지경(志敬) 등이 중심이 되어 재건을 시작하여 1621년 2월 옛 모습을 되 찾았다.
1678년(숙종 4년) 조정에서 실록을 이곳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사고(史庫)를 지키는 사찰로서 조선왕실의 비호를 받게 되었고,
1707년 유수(留守) 황흠(黃欽)이 사각 (史閣)을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翠香堂)이라 이름하고 보사권봉소(譜史權奉所)로 정하였으며,
1719년 이 절의 최고승려에게 도총섭(都摠攝)이라는 직위 를 부여하였는데, 이는 1910년까지 계속되었다.
1726년(영조 2년) 영조가 이곳에 와서 취향당의 제액(題額)을 써주고 고쳐 걸게 하였 으며, 1734년 곡식 수십석을 하사하였다.
또한 1749년 2월 이 절의 중수불사(重修佛 事)가 당시의 총섭 초충(楚充)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는데,
중수에 쓰인 재목의 대부분은 영조가 시주한 것이며, 이때 대조루(對潮樓)도 함께 건립되었다.
또한 1761년 대연(大演)이 법당의 삼존불을 개금(改金)하였다. 1784년(정조 8년) 정 족창(鼎足倉)이 세워졌는데, 규모가 4,5칸에 불과하였으나, 1828년(순조 28년) 양곡 5,000석을 보관할 수 있는 40 - 50칸으로 확장되어 시설절목(施設節目)까지 마련되었다.
1839년(헌종 5년) 서룡(瑞龍)을 비롯한 14명의 승려가 시왕전(十王展)을 수리하고 담장 등을 보수하였다.
1841년 연홍(演弘) 등이 대조루를 중건하였고, 1855년(철종 6년) 규영(奎榮)등이 대웅전을 중수하였으나 이때 경제적으로는 큰 어려움에 빠져 있었다.
1871년(고종 8 년) 포량고(砲糧庫)를 이 절에 건설하였고, 1872년 승군 50명과 총섭 1명을 두고 진상약애고(進上藥艾庫)와 산성별장소(山城別莊所)를 절 남쪽에 건설하였으며,
1876년 에는 효월(孝月)이 대웅전과 약사전을 중수하였다. 1884년 3월 영담(映潭)이 관음암 을 중수하였고,
1905년 주지 서룡이 비로전의 불상과 약사여래 및 칠성탱(七星撑)을 개금불사(改金佛事)하였으며,
1909년 오랫동안 이 절에 보존되었던 사고장본(史庫藏本)을 서울로 옮겼고,
1910년 당시의 군수 한영복이 이 절에 전래되어오던 유물인 동향로를 궁내부에 바쳤다.
1912년 조선불교 30본산의 하나로서 강화, 개성 등 6개군에 소재하는 34사찰을 관리하는 본산으로 승격되었다. 초대주지는 김지순이었고, 2대주지는 국창환이었다.
1915 년 국창환은 국고보조를 얻어 대웅전을 중수하였고, 1916년 신도들의 기부금으로 시왕전과 대조루 등의 건물을 중수하였다.
1928년 3대 주지 이지영이 지장상(地藏像)을 개금하고 명부전을 다시 세우는 한편 적뭉당 30여칸을 수리하고, 식당 26탄의 기와를 바꾸는 대불사를 이룩하였다.
1932년 6대 주지 이보인이 국고보조금과 신도의 기부금으로 대웅전과 극락암을 중수하고, 적묵당, 강설당, 대조루, 명부전, 극락암 등을 중건하였으며,
8대 주지 김정섭은 1934년 전문강원(傳門講院)을 설립하고 안진호에게 부탁하여 사료를 모아 {전등본말사지(傳燈本末寺誌})를 편찬, 발행하였다.
이 절의 가람배치는 전형적인 산지가람의 배치를 따르고 있다. 출입문을 들어서면 바로 양헌수 장군 승전비가 서있고 약간 경사진 산길을 따라 오르면 북쪽으로 대조루에 오르는 계단이 보인다. 절 입구의 대조루를 지나면 정면 남향한 대웅전이 있고 그 주위에는 약사전, 명부전, 삼성각, 향로각, 적묵당, 강설당, 범종각 등이 있다.
보물 제179호인 약사전 내부에는 선정인(禪定印)을 취한 약사여래가 봉안되어 있으 며,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서 내부에는 지장보살살을 비롯한 10구의 시왕(十王), 2구의 귀왕(鬼王), 2구의 판관(判官), 2구의 녹사(錄事), 2구의 장군(將軍), 10구의 동자(童子) 등 29구의 존상이 있고,
1884년에 조성된 후불탱화가 있다.이밖에 향로전은 대웅전의 분수승(焚脩僧)이 거처하는 곳이고,
적묵당과 강설당은 본 래 대웅전에서 서로 마주보는 위치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두 건물은 선원(禪院)과 강원(講院)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중요 유물로는 보물 제393호인 범종과 법화경판이 있다. 범종은 우리나라 종과는 그 형태가 판이한 중국종으로서, 민족항일기 말기의 군수물자 수집공출 때에 빼앗겼으 나, 1945년 광복과 함께 부평에서 발견되어 다시 이 절로 돌아오게 되었다.
또한 법 화경판은 귀중한 장경판으로서 본래 105매 였으나, 1매는 6.25사변 때 파주의 모부대에서 가져갔다고 한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거대한 청동수조와 옥등이 있다. 청동수조의 유래는 잘 알 수 없으나 산화된 상태로 보아 고려시대의 유물로 보이며, 옥등은 대웅전 안에서 불을 켜던 것이다.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1호인 대조루에는 선원보각(瑄源譜閣), 장사각(藏史閣), 취향당 등의 편액이 남아 있고,
사찰 경내에는 70여년 이래로 은행이 한톨도 열리지 않았다고 전하는 수령 600년의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 삼랑성 전설 ] 사적 130호
강화도 남단 정족산 산등성이를 따라 단군의 세 아들 부소(扶蘇), 부우(扶虞), 부여(扶餘)가 쌓았다는 삼랑성(三郞城)이 있고, 전등사는 이 삼랑성 품속에 고즈넉하게 안겨 있다. 전설의 땅 강화도(江華島), 그 남단에 정족산(鼎足山)이란 산이 있고, 산등성이를 따 라 성(城)이 있으니, 이를 이름해 삼랑성(三郞城)이라 한다.
2002. 12. 25
먼저 오래전 글을 옮겨왔다는 점 이해해 주시길...
2004.05.20 21:00 다향 한글사랑
서울로 올라 와서 좋은 점을 고르라면
저 아래 남도에 살면서 거리를 핑게로 가 보지 못했던 곳이나
다시 가 보고 싶은 곳을 애써 멀리해야 한다는 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 일게다.
그런데도 막상 서울로 올라 오니
그것 또한 생각과 달리 만만하지 않았다.
물론 여수에 있을 때 보다는 멀리 떠나는 횟수는 줄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는 많이 가 본 것은 사실이기는 하다.
지난 선거일에는 일찍 선거를 마치고 강화도 전등사엘 다녀왔다.
서울와서 한강 다음으로 간 곳이 인천 영종도와 강화도 마니산이었으니
그 동안 강화도는 몇 번 들렸지만 전등사는 먼 곳의 상상이었다.
서울로 되돌아가는 길의 밀리는 교통지옥을 아래 살 때에는 상상도 못했을 그 이상을 넘어서는 것이기에 웬만한 인내로는 넘기 힘든 벽이 되었다.
광성보, 초지진, 덕포진,등
그래도 갈만한 곳은 다 들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초지진대교가 완공되어 강화 쪽으로 가는 국도의 국 심한 교통 체증을 피하면서 여유롭게 짧은시간에도 다녀올 수 있기에
그동안 미뤄두었던 전등사를 들렸다.
고구려때 고승 아도 화상이 창건하여 1266년 고려 원종 7년에 중창했다는 절. 전등사.
멀리 보성 문덕의 대원사도 아도화상이 지었다는데
그 시대 스님들은 절만 짓다가 세월을 다 보냈나 보다.
전등사 대웅전은 보물 178호로 1615년 조선 광해왕 7년에 다시 지경화상이 기공하여 1621년에 완성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본 건물 위 추녀 끝에 나열된 보주와 귀기둥 제공 위에 조각된 인형물과 내부 불단상에 건조된 닷집이 풍부하고 다채롭게 투각한 장식과 부룡 , 극락조등은 다른 건물에서 볼 수 없는 것으로 조선 중기의 특이한 대표적인 건물의 하나로 탱화가 없는 소박미를 보여 준다.
어디서나 마찬가지이지만 절 뒷편의 오르막에서 내려다 보는 절집은 항상 아늑하면서 묘한 조형미를 갖는다.
혹시 절에 들리면 절 뒷편의 조금 높은 곳에서 가람의 배치와 조형들을 살펴보기를 권한다.
기대 이상으로 많은 것을 느끼고 편안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전등사는 혹시 크기를 기대하고 간다면 알려진 이름에 비해 초라할 정도로 아담스러워 실망일게다
더하여 이 곳에서는 반드시 전등사 외부 성곽 위를 거닐어 보기를 ...
그러면 걷는 동안에 천연 요새지에 자연을 그대로 이용한 성곽의 지혜와 함께 자신도 모르게 소단해질 것이다.
아이들을 남겨두고 아내랑 둘이서만 잠시 다녀온 전등사
차 한 잔의 여유처럼 아름다웠다.
비록 아늑하고 아름다운 죽림다원 차를 마시지는 못했지만
[ 강화도 정족산 전등사(傳燈寺)소개 ]
대웅전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성(鼎足山城)내에 있는 사찰.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에는 강화도의 주봉을 이루는 마니산이 있고 이 산의 한 줄기는 북동쪽으로 뻗어 길상면 온수리에 이르러 다시 세 봉우리를 형성하였는데 이것이 정족산이다.
전등사는 바로 이 정족산성 내에 있는데, 1977년에 복원된 삼랑성의 남문이 현재 전등사의 출입문으로 이용되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傳燈本末寺誌}에 전등사창건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제 1편 1장의 전등사지에 의하면 이절이 본래 고구려 소수림왕11년(381)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개산(開山)하고 진종사라 이름붙였다하고,
그뒤 고려 원종7년(1266)에 사승(寺僧)이 이 절을 다시 창건하였다 한다.
그러나 강화도가 고구려영토가 되는것은 소수림왕11년보다 거의 1백년이 지난뒤인 장수왕 63년 (475)의 일이다.
아직 백제에는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해오지도 않았는데(384년에 전해옴) 백제영토인 강화도에 절이 세워졌다는것은 아마 후세 사람들이 잘못 윤색해 놓은 허구일 것이다.
다만 원종7년(1266)의 중창기사는 믿을만하다고 보아지며 (동국여지승람)권12, 강화 전등사조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원 세조(元世祖) 지원(至元)19년, 즉 충렬왕8년(1282)에 충렬왕 원비(元妃) 정화궁주 (貞和宮主) 왕(王)씨가 승려 인기(印奇)를 시켜 바다를 건너 송(宋)에 들어가서 대장경을 인쇄해 이절에 보관하게했다는것이다.
그리고 {江華府志}에서는 부처님 앞에 불을 밝히는 옥등잔도 역시 정화궁주가 보시(布施)한것이라고 했는데
{전등본말사지}에서는 옥등잔을 헌납함으로써 절 이름을 고쳐 전등사라 사액(賜額)하였다고 일컫고있다.
그 뒤 1337년(충숙왕 복위 6년)과 1341년(충혜왕 복위 2년) 이 절의 승려들이 중수하 였다.
1605년 (선조 38년) 불이 나서 전체 건물의 반 가량이 타버렸고, 1614년 (광해 군 6년) 12월 또다시 불이 나서 나머지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이듬해 4월 지경(志敬) 등이 중심이 되어 재건을 시작하여 1621년 2월 옛 모습을 되 찾았다.
1678년(숙종 4년) 조정에서 실록을 이곳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사고(史庫)를 지키는 사찰로서 조선왕실의 비호를 받게 되었고,
1707년 유수(留守) 황흠(黃欽)이 사각 (史閣)을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翠香堂)이라 이름하고 보사권봉소(譜史權奉所)로 정하였으며,
1719년 이 절의 최고승려에게 도총섭(都摠攝)이라는 직위 를 부여하였는데, 이는 1910년까지 계속되었다.
1726년(영조 2년) 영조가 이곳에 와서 취향당의 제액(題額)을 써주고 고쳐 걸게 하였 으며, 1734년 곡식 수십석을 하사하였다.
또한 1749년 2월 이 절의 중수불사(重修佛 事)가 당시의 총섭 초충(楚充)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는데,
중수에 쓰인 재목의 대부분은 영조가 시주한 것이며, 이때 대조루(對潮樓)도 함께 건립되었다.
또한 1761년 대연(大演)이 법당의 삼존불을 개금(改金)하였다. 1784년(정조 8년) 정 족창(鼎足倉)이 세워졌는데, 규모가 4,5칸에 불과하였으나, 1828년(순조 28년) 양곡 5,000석을 보관할 수 있는 40 - 50칸으로 확장되어 시설절목(施設節目)까지 마련되었다.
1839년(헌종 5년) 서룡(瑞龍)을 비롯한 14명의 승려가 시왕전(十王展)을 수리하고 담장 등을 보수하였다.
1841년 연홍(演弘) 등이 대조루를 중건하였고, 1855년(철종 6년) 규영(奎榮)등이 대웅전을 중수하였으나 이때 경제적으로는 큰 어려움에 빠져 있었다.
1871년(고종 8 년) 포량고(砲糧庫)를 이 절에 건설하였고, 1872년 승군 50명과 총섭 1명을 두고 진상약애고(進上藥艾庫)와 산성별장소(山城別莊所)를 절 남쪽에 건설하였으며,
1876년 에는 효월(孝月)이 대웅전과 약사전을 중수하였다. 1884년 3월 영담(映潭)이 관음암 을 중수하였고,
1905년 주지 서룡이 비로전의 불상과 약사여래 및 칠성탱(七星撑)을 개금불사(改金佛事)하였으며,
1909년 오랫동안 이 절에 보존되었던 사고장본(史庫藏本)을 서울로 옮겼고,
1910년 당시의 군수 한영복이 이 절에 전래되어오던 유물인 동향로를 궁내부에 바쳤다.
1912년 조선불교 30본산의 하나로서 강화, 개성 등 6개군에 소재하는 34사찰을 관리하는 본산으로 승격되었다. 초대주지는 김지순이었고, 2대주지는 국창환이었다.
1915 년 국창환은 국고보조를 얻어 대웅전을 중수하였고, 1916년 신도들의 기부금으로 시왕전과 대조루 등의 건물을 중수하였다.
1928년 3대 주지 이지영이 지장상(地藏像)을 개금하고 명부전을 다시 세우는 한편 적뭉당 30여칸을 수리하고, 식당 26탄의 기와를 바꾸는 대불사를 이룩하였다.
1932년 6대 주지 이보인이 국고보조금과 신도의 기부금으로 대웅전과 극락암을 중수하고, 적묵당, 강설당, 대조루, 명부전, 극락암 등을 중건하였으며,
8대 주지 김정섭은 1934년 전문강원(傳門講院)을 설립하고 안진호에게 부탁하여 사료를 모아 {전등본말사지(傳燈本末寺誌})를 편찬, 발행하였다.
이 절의 가람배치는 전형적인 산지가람의 배치를 따르고 있다. 출입문을 들어서면 바로 양헌수 장군 승전비가 서있고 약간 경사진 산길을 따라 오르면 북쪽으로 대조루에 오르는 계단이 보인다. 절 입구의 대조루를 지나면 정면 남향한 대웅전이 있고 그 주위에는 약사전, 명부전, 삼성각, 향로각, 적묵당, 강설당, 범종각 등이 있다.
보물 제179호인 약사전 내부에는 선정인(禪定印)을 취한 약사여래가 봉안되어 있으 며,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서 내부에는 지장보살살을 비롯한 10구의 시왕(十王), 2구의 귀왕(鬼王), 2구의 판관(判官), 2구의 녹사(錄事), 2구의 장군(將軍), 10구의 동자(童子) 등 29구의 존상이 있고,
1884년에 조성된 후불탱화가 있다.이밖에 향로전은 대웅전의 분수승(焚脩僧)이 거처하는 곳이고,
적묵당과 강설당은 본 래 대웅전에서 서로 마주보는 위치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두 건물은 선원(禪院)과 강원(講院)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중요 유물로는 보물 제393호인 범종과 법화경판이 있다. 범종은 우리나라 종과는 그 형태가 판이한 중국종으로서, 민족항일기 말기의 군수물자 수집공출 때에 빼앗겼으 나, 1945년 광복과 함께 부평에서 발견되어 다시 이 절로 돌아오게 되었다.
또한 법 화경판은 귀중한 장경판으로서 본래 105매 였으나, 1매는 6.25사변 때 파주의 모부대에서 가져갔다고 한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거대한 청동수조와 옥등이 있다. 청동수조의 유래는 잘 알 수 없으나 산화된 상태로 보아 고려시대의 유물로 보이며, 옥등은 대웅전 안에서 불을 켜던 것이다.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1호인 대조루에는 선원보각(瑄源譜閣), 장사각(藏史閣), 취향당 등의 편액이 남아 있고,
사찰 경내에는 70여년 이래로 은행이 한톨도 열리지 않았다고 전하는 수령 600년의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 삼랑성 전설 ] 사적 130호
강화도 남단 정족산 산등성이를 따라 단군의 세 아들 부소(扶蘇), 부우(扶虞), 부여(扶餘)가 쌓았다는 삼랑성(三郞城)이 있고, 전등사는 이 삼랑성 품속에 고즈넉하게 안겨 있다. 전설의 땅 강화도(江華島), 그 남단에 정족산(鼎足山)이란 산이 있고, 산등성이를 따 라 성(城)이 있으니, 이를 이름해 삼랑성(三郞城)이라 한다.
2002. 12.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