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25'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9.12.25 내가 좋아하는 기타리스트 함춘호
  2. 2019.12.25 봉사의 욕심... . 1

내가 좋아하는 가수 송창식과 늘 함께 나오는 기타리스트 ... 본인도 최고의 테크니션 기타리스트이면서도 늘 함춘호를 앞세운다 

그의 가시나무를 아쿠아스틱으로 연주하는 음을 들어보라. 반하지 않을 수 없다.

자세히 보니 나와 갑장이며 생일이 5일 빠르다.


하단의 그의 인터뷰와 고백을 자세히 들어보기를 희망한다. 왜 유명한 가수들이 늘 그와 함께 공연하기를 원하는지...



함춘호 
1961년 8월5일생으로 예원중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하던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기타를 시작하였고, (송창식의 기타연주와 노래에 반하여 기타를 시작함) 고3이던 1980년에 가수 전인권을 만나 그룹 '전인권과 함춘호'라는 그룹으로 잠시 듀엣을 하면서 대중음악인의 길로 나섰다. (이 때 처음으로 송창식과는 또 다른 가수가 있다는 걸 깨달음과 동시에 자신이 직접 노래를 부르는 것에 한계를 느껴 좌절을 겪으면서 세션 기타리스트로 최고가 되기로 방향을 전환한다.) 1984년 하덕규가 이끌던 포크록 그룹 시인과 촌장에 합류하였고, 2집 음반 《푸른 돛》의 참여하면서 기타리스트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1986년에 발매된시인과 촌장 2집 《푸른 돛》은 2007년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의 14위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조용필, 양희은, 송창식, 김현식, 신승훈, 임재범, 윤종신, 박정현, 보아 등 유명 가수들의 앨범과 라이브 세션으로 참여하면서 최정상급 기타리스트로 이름을 알렸다.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30여년 동안 꾸준히 활동하면서 많은 음악인들과 제작자에게서 인정받는 대중 음악계의 거장으로 손꼽히고 있다. 함춘호의 연주는 리프(Riff:반복선율)를 두 번 반복하지 않는다는 점과 다른 연주자들에게서 볼 수 없는 독특하고 따뜻한 느낌을 구현한다는 점에서 가장 큰 장점으로 여긴다.
2014년 현재, 서울신학대학교 실용음악과 교수 재직중이며, 대중음악인 단체인 한국 소리모음회(한국연주자협회) 회장과 기독음악인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다.

대한민국 기타리스트 함춘호 바로보기
https://youtu.be/0btPrSxiP1w

소망콘서트 . 함춘호 세브란스병원 재능기부 바로 보기
https://youtu.be/tqZCopJCf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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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한글사랑(다향)

 

은퇴하면 봉사하는 활동에 시간을 내어야겠다고 뒤로 미뤄뒀는데 막상 퇴직을 하고보니 이제 현실적으로 육체적인 봉사는 어렵게 되었다. 역시 무슨일이든 마음먹으면 뒤로 미루지않고 쇠뿔도 단김에 빼듯 바로 실천해야지, 바쁘다고 뒤로 미루다보면 이런 경우가 허다하게 발생한다.

그나마 오랫동안 그리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두어군데 소액이나마 꾸준하게 기부를 해온 단체가 있다. 엊그제 그 중 한 곳에서 안정족인 보금자리를 마련했다는 기쁜 소식지를 보내왔다.

그 내용을 읽어보다가 그 보금자리 마련 이전에 34년 동안 13번 이사를 하면서 겪었던 사연들이 적혀있었다. 이사하는 날 시설 현황을 보고 바로 방을 빼달라거나, 얘기가 잘되어 이사하려는데 계약을 물려달라는 등의 그동언 겪었던 어려움들이 묻어 있었다.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드디어 보금자리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이제 이사에 대한 걱정거리 하나가 사라졌다는 얘기는 남의 얘기가 아닌 나의 어린시절 기억이기도 하다. 나의 어린 시절에 겪었던 집없는 설움, 더 나아가 아이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주인에게 당한 설움으로 어머니의 남몰래 숨죽여 우는 것을 몇차례 모른척하고 지켜보아야 했던, 셋방살이의 설움 그대로였다.

국민학교 입학전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광주의 변두리로 어머니, 나, 그리고 동생 둘이랑 함께 이사를 왔다. 지금 어머니께서 사시는 곳에서 3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으로 (이상하다. 어디선가 첫 삶의 터를 잡으면 쉽사리 그곳을 못 떠난다. 나도 직장따라 서울에 처음 정착한 곳애서 근 15년을 셋집살이로 맴돌았으니 ) 이사온 첫날밤 방틈새로 스며든 연탄가스로 온식구가 거의 죽다가 살아났다. 그때 옆집의 아주머니가 주신 동치미 국물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당시 연탄가스 마시면 동치미 국물을 마시게 하는게 민간 요법이었다. 그래서 그 집을 떠나 같은 동네로 옮겼다. 아이들 셋의 영향으로 몇달 못살고 쫓겨나다시피 이사를 했다. 이번에는 조금 멀리 떨어진 곳으로 집을 얻을 때 아이는 나혼자인 것 처럼 하고 식구수를 줄여 집을 얻고서 이사를 했다. 이사 당일에 나만 함께 이사를 하고 두 여동생은 밤늦게 데려왔다. 결국 며칠 지나지 않아 주인댁에서 알게되어 그에 대한 잔소리를 했는데 이사가라는 말은 없었다. 주인집에도 아이들이 다섯명이나 되어서인지 이해를 해주었고 또래들이어서 조금씩 나아졌고 거기서 네째가 태어났다. 물론 아이들이 떠들면 떠든다고 주인댁에서 싫은 소리를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 주인은 양반에 가까웠다.

우여곡절 끝에 두어차례 더 이사를 했고(부엌도 없던 행랑채 비슷한 곳에 수돗물도 없이 옹달샘물을 먹던 준 산골집도 거쳤다 ) 그 사이에 네째가 태어났고, 마지막으로 지금 집에서 막내 여동생이 태어났다. 그집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땀으로 지은 집이다. 산밑 산번지의 땅을 사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매일 새벽에, 일을 마친 저녁에 땅을 파서 평지로 메꾸는 작업을 했고 당신의 직업을 살려 비록 무허가지만 방세칸을 뚝딱 지었다. 이사를 마친 다음날 어머니는 그날 처음으로 발뻗고 편히 주무셨다 했다. 그 뒤로도 집 뒷편을 파내는 작업이 계속되었고 근 일년만에야 터다운 집이 되었다. 그 사이 상하방 한칸을 더 달아냈고 두어번 축대가 무너져 고생하기도 하셨다. 그래서인지 방을 세내어줄 때 아이들 많은 걸 가리지 않고 세를 내어줬고 그뷴들과 사이좋게 살았던것 같다. 지금도 우리 집을 거쳐간 분들과 왕래도 하고 애경사도 챙기고, 모임도 하는걸 보면 ....

이야기가 다소 다르게 흘렀다.

봉사 이야기를 하고싶었는데... ...
이제는 육체적 봉사는 엄두를 낼 수 없을 것 같아서 아쉽고 씁쓸하다. 은퇴를 하면 이런저런 봉사를 해야지하고 염두에 둔 봉사는 이제 물건너 간 셈일까?

아직도 난 그 희망을 버리지는 않는다.

년말, 성탄절이 다가오자 그 기부 단체에서 감사의 인사와 함께 안부를 물어온다.

내가 드리는 기부액이야 소액이지만 그 분들에게는 큰힘이 되었으면 하는 욕심을 내어본다.

어렸을 때 미국 한 할머니에게 매달 5달러씩 후원받은 어느 분의 이야기다. 그 분 역시 그 도움을 잊지않고 페루의 아이들을 계속 후원하고 있다.


기부나 봉사활동을 망설이는 이들에게 그는

“중간에 후원을 멈추면 아이들이 상처받을까 봐 걱정하는 사람도 많은데 일단 한 번이라도 해보길 권한다”며 “망설이면 아무것도 안 된다. 작아 보이는 5달러나 2만~3만원이 누군가에게는 잊을 수 없는 ‘장난감 기차’나 ‘만년필’처럼 작은 기적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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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한글사랑(다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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