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흑백논리에 사로잡힌 세대에 태어나서 자랐습니다.
그런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다르면 틀리는 것으로 생각하는게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다 대학생이 되어서 읽은 "이 에이치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이영희 교수의 우상과 이성"
그리고 "아놀드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의 원리"를 읽고서야 많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서야 나와 같지 않다는 것은 "틀림"이 아니라 "다름" 이라는 것을 알고서
나의 편협하고 부족했던 나의 사고를 우리에 갇혔다가 풀려난 듯 자유로움 속에서
가장 보편적인 삶의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의 정신적인 멘토인 "법정스님"의 글을 보고, 직접 만나 뵙고서야
또 다른 세계를 만난듯한 기분으로 참 행복을 알게 되었습니다.
법정 스님과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아내와 만나서 결혼 전에 전남 순천의 송광사를 들린 적이 있었습니다.
아내가 존경하는 법정스님을 뵙기 위해서 "불일암"에 들렸다가
멀리로 출타중인 스님을 뵙지는 못하고 그 분의 향기만을 맡고 되돌아섰습니다.
그러다가 서울 길상사의 "맑고 향기롭게"에서 그 분을의 설법을 듣고
직접 만나뵙고 좋은 말씀을 듣기도 했습니다.
제가 그분을 길상사에서 만나뵐 수 있었던 계기는
제가 가장 존경하는 옛 상사께서 대학시절 그분의 가르침에 감복되어서 길상사의 모임
"맑고 향기롭게" 모임과 자원봉사에 잠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그분이 열반하시고 난 후 그분의 다비식에는 일정상 참석을 못하고
일년이 지난 후에야 그분의 다비식 장소와 그분의 추모제에 운좋게 함께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개신교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천주교로 개종(?)을 했습니다.
이 개종의 가장 큰 기쁨은 개신교와 달리 "다름"을 인정해 준다는 것입니다.
사십년 이상을 개신교의 신앙으로 자라온 내게도 "다름은 틀림"이라는 전제조건에 익숙해 있지요.
아마도 내게는 천주교 신자의 신앙 생활에 대한 부러움이 있었습니다.
대학 시절에 천주교 신자들의 광주 518에 대한 부끄러움 없는 마음 (개신교는 애써 회피할 때)과
상대 종교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세에 부러움이 있었나 봅니다.
잠깐 주제에 버서난 듯 하지만
최근에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자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에 대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는 설화를 보면
프로크루스테스의 본디 뜻은 '두들겨서 펴는 자'라는 뜻으로 프로크루스테스는 대장장이처럼 나그네를
침상에다 눕혀놓고 그 몸을 두들겨서 펴 늘이거나 잘라서 침대의 길이에 맞춰 죽였다는 것이다.
아뭏튼 시사하는 바는 "남의 길이를 제 자에 맞추는 자의 횡포"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데
이는 "나와 다르면 틀리다"라는 사고방식의 좋은 예입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이미 "나와 같지 않아도 틀린게 아니라 다르다"는 것에 익숙해져있는데
기성새대는 아직도 이에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평생 익숙해져 온 삶의 방식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 같습니다.
"틀림과 다름"을 명확히 구별하고
이를 삶의 사고에서 적용한다면 정녕 한단계 진일보한 대한민국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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