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개 없는 동물 이야기

 

스페인 여행 중에 아내와 함께 마차를 탔는데, 흑갈색 말의 두 눈꼬리 바깥쪽에

검은 차단안대가 채워져 있었다.  마부에게 “말의 눈가에 왜 차단안대를 채웠어요” 하고 까닭을 물어보니, 마부가 대답했다.

“말의 두 눈은 180도를 볼 수 있는데, 사각(斜角)의 움직이는 어떤 물체가 
문득 무서운 괴물로 보이는 수가 있어, 겁이 많은 말은 갑자기 튀어 달아나므로 그것을 예방하기 위해 오직 90도 안쪽만 내다볼 수 있게 그렇게 하는 겁니다” 하고 대답했다.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나는 말의 눈꼬리에 채워져 있던 검은 차단안대에 대하여 집요하게 생각했다.

오래전 제주도에 가서, 평생 말과 함께 살아온 태우리 노인을 만난 적이 있다. 그

때 그 노인은 “말은 쓸개가 없는 동물이여” 하고 말했다.

“쓸개가 없으니 강물도 소가지 없이 무서워하지 않고 사람을 태우고 건너는 것이여.

그런데 헛것을 보면 마구 튀어 달아나버려. 겁이 많은 것도 쓸개가 없어서 그래.”

말은 심지어 자신이 뀐 방귀 소리에도 놀라고, 나무
잎사귀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고도 놀라고, 
 자기 뒤에서 자기 꼬리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보고도 놀라는 것이다.

말이 전쟁터에서 창과 칼을 겁내지 않고 돌진하는 것도 쓸개가 없기 때문이고,  헛것에도 놀랄 만큼 겁이 많은 것도 쓸개가 없기 때문이라는 말이 사실일까.

한 수의사에게, 말은 쓸개 없는 동물이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육
식을 하지 않으므로 쓸개가 없도록 진화했다는 것이었다.

 


‘쓸개 빠진 사람’이란 말이 있다.

흔히, 정의롭고 염치 있게 살기를 거부한 사람, 성실하고 부지런히 살기를 내팽개친 사람,

정상적인 판단력을 잃고 부화뇌동하고 어영부영하는 사람을 쓸개 빠진 사람이라고 말한다. 쓸개 없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한심한 세상 속에서 나는 차단안대를 하고 사는 것이 어디 말뿐일까 하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 세상 대다수의 사람은 스스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두 눈 가장자리에
차단안대를 만들어 달고 살아가려고 분투한다. 축구 선수는 축구만 바라보고, 야구 선수들은 야구만 바라보고, 정치인들은 자기에게 찍어줄 표(票)만 바라보고, 장사꾼들은 이익만 바라보고,

사기꾼들은 사기 치기에 알맞은 사람만 바라보고 살아간다. 바람둥이는 한번 꾀어서 즐길 이성만 바라보고 살아가고, 공짜를 즐기는 사람은 오늘은 누구를 꾀어 저녁을 맛있게 얻어먹을지만 생각한다.

 

따지고 보면 나도 그렇다. 내 두 눈꼬리 양쪽에 차단안대 하나씩을 달아놓고, 오직 그 안에 들어오는 나의 문학 세계만 바라보고 살아왔다.

나는 나의 문학을 위하여 많은 것을 차단안대 밖으로 버렸다.

이십대 후반부터 사십대 초반까지 광주의 한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었다.

그 기간에 나는 학교 수업을 하지 않아도 되는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과 여름방학,

그리고 겨울방학이 없는 세상을 살았다. 다른 사람들이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방학을 이용하여 취미 생활을 즐겼지만, 나는 서재 속에 박혀 나의 문학만 팠다.

낚시질·등산이나 당구 탁구 또는 야구·축구 구경, 여행 따위의 취미 활동을 모른 채

오직 책을 읽고 소설만 쓴 것이다. 서재 바람벽에는 하얀 종이에다가 ‘광기(狂氣)’를 한자로 써서 붙여 놓고 그야말로 미친 듯이 집필만 했다.

나는 무엇보다 시간에 인색하다. 시간에는 원단 시간과 자투리 시간이 있다.

취미 활동을 위하여 원단 시간을 사용하고 남은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소설을 쓴다는 것은 나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의 두 눈꼬리 가장자리에 차단안대를 하고 소설 쓰기에 집중하는 그것은 나의 운명이 되었다.

소설 쓰기에 그렇듯 집착한 것은 나의 어찌할 수 없는 환경 때문이었다.

9남매 피붙이들 가운데 유일하게 돈벌이를 할 줄 아는 나는 배고픈 어린 동생들을 먹이고 가르치고 시집 장가보내는 일을 줄곧 도맡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학교 봉급만으로는 빚을 질 수밖에 없으므로 그 빚을 갚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던 것인데, 돈을 버는 재주라는 것이 오직 소설 쓰기뿐이었던 것이다. 그 미친 소설 쓰기는, 모든 형제가 각자 독립을 한 다음에도 내 삶의 관성이 되었고, 그것은 마침내 기본 경제활동의 바탕이 된 교직을 버리고 전업 작가 노릇으로 이어졌다. 그러면서부터 나는 나의 존재 의미인 문학을 위하여 나의 두 눈꼬리 가장자리에 차단안대를 더욱 확고히하고 살아온 것이다.


차단안대를 하고 살아온 말의 눈에서 차단안대를 떼어내면 말이 불안해할 것이다.

나도 차단안대를 떼어내면 불안해서 못 산다. 나는 하루에 일정 분량의 시나 소설을 쓰거나, 이미 써놓은 원고를 수정, 가필하는 작업을 하거나 일정한 분량의 책 읽기를 하지 않으면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처럼 불안해진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 아내의 얼굴에도 차단안대가 두 눈꼬리 가장자리에 달려 있다.

지난해 그녀는 나에게 ‘해와 달과 별만 바라보는 당신의 등만 쳐다보고 당신의 그림자만 밟으며 있는 듯 없고, 없는 듯 있게 살아왔지만 나 그래도 행복했네’라는 짧은 시 한 편을 써서 내밀었다. 내가 나의 문학만 보듬고 살아오는 동안 아내가 내 등 뒤에서 그림자만 밟으며 살아온 것이 남편인 내가 잘나서인 줄 알았다, 그때까지는. 하지만 그게 아니고, 자세히 보니 그녀 두 눈꼬리의 운명적인 차단안대 때문이었다.

 

한승원 소설가

                            

위의 글을 보면서 나역시 마찬가지로 차단 안대를 쓰고 살아온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 생활이 그런 셈인데 어느 평일 날 일이 있어 하루를 쉬는 때가 있는데 그 일을 마치고 나면 마치 공중에 붕 떠있는 느낌이 들고 웬지 모든 것들이 낯설어 지곤 한다.

예전 본사에 근무할 때 어느 날엔가 일이 한가한 날 정시에 퇴근을하는데 회사 앞 여의도 공원이 낯설었다. 늘상 위에서 내려다 보거나 점심 시간에 잠시 걸었던 길인데도 퇴근 시간에 보는 공원과 도로, 아니 환한 바깥 풍경이 낯설게 느껴져 같이 퇴근 하던 동료들이랑 웃으면서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게 습관에서 벗어난 관성에서 오는 느낌이라 해도 마차나가지이다.

 

위의 글은 충분히 공감이 간다.

                                   

Posted by 한글사랑(다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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