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함민복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난 길디 긴 시 보다는 짧은 시가 좋다.

그 이유는 시가 짧을수록 그 시 속에 감춰둔 뜻을 찾는 생각은 길어진다. 

어느 날엔 가까히 숨은 듯 찾아낸 마음을

다음 날엔 또 다른 마음을 찾아낼 수 있어 좋다.

내 생각을 얽어매지  않아 마음을 열리게 만드는 것이다.

 

짧은 시 한 구절은 

내 마음 한켠의 추억을 되살려 놓기도 하고

어느 날에는 내 지나 온 과거의 삶에 오늘의 고민이 함께 뒤섞이고

나도 모르게 섞여진 것들이 범벅이 되어 나를 물들어 놓는다.   

 

그래서 좋다.

마치 그 시를 내가 다시 완성 시킨 듯해서....

 

어느 날에는 긴 시 조차도 짧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아래의 시가  그런 셈이다. 

 

 

 

사과를 먹으며

                          함민복

 

사과를 먹는다

사과나무의 일부를 먹는다

사과꽃에 눈부시던 햇살을 먹는다

사과를 더 푸르게 하던 장마비를 먹는다

사과를 흔들던 소슬바람을 먹는다

사과나무를 감싸던 눈송이를 먹는다

사과 위를 지나던 벌레의 기억을 먹는다

사과나무에서 울던 새소리를 먹는다

사과나무 잎새를 먹는다

사과를 가꾼 사람의 땀방울을 먹는다

사과를 연구한 식물학자의 지식을 먹는다

사과나무 집 딸이 바라보던 하늘을 먹는다

사과에 수액을 공급하던 사과나무 가지를 먹는다

사과나무의 세월, 사과나무 나이테를 먹는다

사과를 지탱해온 사과나무 뿌리를 먹는다

사과의 씨앗을 먹는다

사과나무의 자양분 흙을 먹는다

사과나무의 흙을 붙잡고 있는 지구의 중력을 먹는다

사과나무가 존재할 수 있게 한 우주를 먹는다

흙으로 빚어진 사과를 먹는다

흙에서 멀리 도망쳐보려다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 사과를 먹는다

사과가 나를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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