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저녁 

                                         마종기

 
천 년을 산 나비 한 마리가
내 손에 지친 몸을 앉힌다.
천 년 전 앙코르와트에서
내 손이 바로 꽃이었다는 것을
나비는 어떻게 알아보았을까.

그해에 내가 말없이 그대를 떠났듯
내 몸 안에 사는 방랑자 하나
손 놓고 깊은 노을 속으로 다시 떠난다.
뜨겁고 무성하고 가난한 나라에서
뒤뜰로만 돌아다니는 노란 나비.

흙으로 삭아가는 저 큰 돌까지
늙어 그늘진 내 과거였다니!
이제 무엇을 또 어쩌자고
노을은 날개를 접으면서
자꾸 내 잠을 깨우고 있는가.
 
 
 

우화의 강

                                 마종기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서로 물길이 튼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 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어야겠지만
한 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 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 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 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 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 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인물사진
마종기 시인
출생 1939년 1월 17일 (일본)
가족 아버지 마해송 (어머니:박외선,한국최초의서양무용가 )
학력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서울대학교대학원 의학
데뷔 1959년 현대문학 시 '해부학교실'
수상 2003년 제16회 동서문학상
경력 오하이오주립대학교 아동병원 초대 부원장, 방사선과 과장
 
시인 마종기는 1939년 일본 동경에서 태어나 연세대 의대, 서울대 대학원을 마치고 1966년 도미, 미국 오하이오 주 톨레도에서 방사선과 의사로 근무했다. 1959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한 그는 『조용한 개선』(1960), 『두번째 겨울』(1965), 『평균율』(공동시집: 1권 1968, 2권 1972), 『변경의 꽃』(1976),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1980),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1986), 『그 나라 하늘빛』(1991), 『이슬의 눈』(1997),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2002) 등의 시집과 산문집 『별, 아직 끝나지 않은 기쁨』(2003)을 발표했다. 2006년 미국의 화이트 파인(White Pine) 출판사의 '한국의 목소리' 시리즈로, 한국문학번역원 지원을 받아 시선집 『Eyes of Dew』를 출간하기도 했다. 한국문학작가상, 편운문학상, 이산문학상, 동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작가 이야기

작가 이야기 - 나의 가족과 나의 시

1~5 까지 이어지는 작가의 글은 생략하고 마지막 글만 옮겨봅니다. 다시 읽어도 좋은 글입니다.

 

이제 나는 오래 떨어져 있어도 못내 사랑을 끊을 수 없었던 모국어를 다시 만지며 겸손한 마음으로, 남아 있는 내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아름다운 시를 빗고 문학을 만들어보려 한다. 내 재주가 부족해서 바라는 만큼의 문학은 못 하게 되겠지만 그 마지막 순간에는 꼭 감사하다는 인사를 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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