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바지 뒷주머니의 센스

 

산모퉁이를 돌아서면 여름내 토실이 컸던 밤과 도토리 등이 가을 이야기를 내려놓고 있다. 올해엔 큰 바람이 휩쓸지 않아 과일도 벼도 뜰 안 가득 햇볕에 풍성하다.

과수원의 사과는 가지가 힘겹게 휘청거린다.

그와 걸맞게 사람 마음도 여유와 넉넉함이 넘쳤으면 좋겠다. 간간이 나는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마음공부도 헛 공산이었던가’. 남의 마음이 아프면 나도 아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남들이 즐겁다 해도 그게 왜 즐거운 줄 모르는 시간들이 지나갔다.

요즘 잠이 부족해 약에 의지하는 날이 있다. 숙면도 내 맘대로 되지 않을 때 공허감이 밀려온다.
내가 아는 선배는 눈만 감으면 쉽게 잠이 든다. 그게 당신의 자랑 중 큰 자랑이다.

옆 사람들이 이야기꽃을 피워도 별로 안중에 없다. 잠도 음식처럼 맛있게 또는 은근히 취하는 술처럼 되었으면 참 좋다. 예전 어머니는 잠복도 타고나야 하며 더 좋은 것은 죽음복도 잠 속에 꿈결처럼 가야 한다고 가끔 말씀하셨다.

한번은 선배에게 “도대체 그리 쉽게 잠이 드시는 비결이 뭔가요”라고 물었다.

대답은 단순했다.

 

첫째, 내일 걱정을 하지 마라. 그게 다 쓸데없는 것이다.

사람들 대부분은 내일, 내년, 노후 걱정으로 근심 떠날 날이 없다.

수도인은 잠 하나는 제대로 자야 ‘수행자’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는 가진 것이 많지 않으면 쉽게 잠이 든다.

우린 알고 보면 못 가진 것에 대해 다들 고민한다. 그러니 제대로 잠을 잘 수 없다.

고장 나면 고쳐 쓰는 것이 일상이고, 모자라니 한 뼘 끈을 달아 이어붙이며,

낡고 해어지니 수리하는 것은 삶의 겸손에 대한 응답이다.

 

선배 교무는 묵은 추억담을 말했다. “니네들 청바지 아냐?

살면서 형식을 별로 안 좋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형식은 청바지 뒷주머니와 같은 거다. 비록 사용하진 않지만 그게 있어 멋지지 않냐? 세상 이치도 형식이 내용보다 중요하다.”

말씀을 이어 초급 교무 시절, 시주의 은혜를 헛되이 않기 위해 뭐든 절약하려고 머리를 썼는데,
스승의 안부 편지가 오면 그 편지 겉봉을 뒤집어 다시 답신을 보냈다고 했다.

그 일이 소문이 나 ‘짠돌이’ 소릴 듣긴 했지만 오히려 그때가 그립다고 한다.

가을비 추적추적한 날, 시인 한 분이 멀리서 오셨다.

당신의 말씀 중에 우리의 시(詩)는 두 가지 질긴 근육이 있는데,

하나는 ‘너무 순수한 척하는 시’이고 또 하나는 ‘너무 가르치려 하는 교훈적 시’라 했다.

종교도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어느 날 미국 시인이 찾아와 “산에는 꽃이 피네 꽃이 피네”가 어떻게 시가 되느냐고 진지하게 물었단다. 당연히 산에 꽃이 피는 건데 그게 무슨 시가 되느냐고 하여 함께 웃었다 했다. 그가 가신 뒤, 그의 시집에는 이런 글이 있었다.

 ‘시는 때로 욕망의 무게를 지니지만 구름은 만개한 공허’.

나에게 가끔 질문한다. 정말 순수함이 세상을 온전히 밝히는가.

순수를 추구할수록 오히려 손해 보는 일은 어찌할 것인가.

성직자들이 가장 쉽게 받아들이는 ‘존경’이란 말도 쉽지 않은 말이다.

존경은 사람 면전에서 하는 말도 아니기 때문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제자들에게 “뿌리 없는 유언(流言)에 끌리지 말고,

시국에 대한 말을 함부로 하지 말며, 다른 종교나 그 숭배처를 훼방하지 말 것이요,

다만 남의 허물을 잘 덮어주라”고 하셨다.

공허한 시구보다 오히려 간결한 울림이다.

정은광

원광대학교 미술관 학예사. 미학을 전공했으며 수행과 선그림(禪畵)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마음을 소유하지 마라』가 있다.

Posted by 한글사랑(다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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