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아래 글은 한겨레 신문 14년 2월 8일자 토요판에 실린 글을

스크랩해서  저장해 놓았다가 다시 읽고서 이렇게 공개로 전환해 놓습니다.

그 때는 이 글이 내게 안타까움과 함께 기억을 더듬게 만들었습니다. .

 

아버지께서 돌아 가시기 조금 전에 요양차 막내 여동생이 살고 있는 곳에서

병원의 원장님 소개로 근처의 요양원에 한달여 정도 계셨습니다.

다행히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하셔서 건강하게 다시 집으로 오셨는데 얼마뒤

조금 편찮으시자 다시 요양원이 어떠시냐는 권유에 아버지는 손사레를 치셨습니다.

다들 건강이 안좋은 (치매 환자도 계시고) 할아버지 할머니들 틈에서 정신이 온전하시고

거동도 자유스러운 아버지께서는 그 곳에서의 편안함 보다는 자유를 더 원하신 것 입니다.

간병인들과 친하셔서 퇴원 때에는 선물과 함께 좋아 하시던 책을 박스로 선물받았습니다.

그래도 대부분의 환자들이 치매환자들과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 이시라 마음이 불편하셨나 봅니다. 

실제로 자원봉사차 회사에서 좀 떨어진 요양원에 정기적으로 목욕 봉사를 가곤 했었는데

그 봉사 과정중에 실제 요양원의 형편과 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당신의 건강과 동생의 손길이 있는 요양원임에도 당신의 뜻대로 따랐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셔서 결국 운명을 달리 하신 후에

한 때 "그 때 한달 정도 더 계시게 할 것을"하고 후회하기도 했었습니다.

 

실제 주위의 치매 환자분들을 돌보는 가정들을 보아온 저로서는

아래 글의 내용은 많이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건강해야 하겠습니다.

 

--- <이하 옮기는 글 >---------

 

가족 / 할머니의 치매

▶ 얼마 전 한 아이돌 가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할머니가 함께 생을 마감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가수의 아버지는 치매에 걸린 자신의 아버지와 암에 걸린 어머니를 더이상 부양할 수 없다는 말을 남겼지요. 사건을 본 우리 가족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자살을 두고 흔히 하는 '목숨이 그리 가볍냐'는 비판도, '안쓰러워 어쩌누'라는 위로도 할 수 없었어요.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들이 겪었을 고통을 조금은 알기 때문입니다.

 

"언니, 어딜 나가? 어제랑 그제도 내가 할머니 당번했잖아."

"미안해. 남자친구 오랜만에 만나는 거 알잖아. 한번만 봐줘."

"진짜 이기적이다. 나도 오늘 약속 있다고. 할머니보다 남자친구가 더 중요해?"

"카드 줄 테니까 할머니 맛있는 거 사드려. 나 갈게."

"야 이 싸가지 없는 년아. 언니! 야!"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왔다.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할머니를 모신 지 두달 만에 우리는 지쳐 있었다.

효자라면 효자였다. 아버지를 비롯한 6남매는 부모에게 자주 찾아가는 편이었고 용돈도 적지 않게 드렸다. 입만 열면 '우리 어머니 같은 사람 없다'는 말을 하고 하루 한 번 전화도 빼먹지 않았다. 할머니가 동네로 찾아오는 장사꾼들에게 속아 가짜 건강식품이나 게르마늄 옥매트, 불량 청소기 따위를 사들였을 때도 자식들은 그저 웃었다. '우리가 더 자주 찾아뵈었으면 저런 일이 없었을 텐데'라는 반성이 먼저 나왔으니까.

그런데도 할머니는 끝내 자식들의 효성을 시험해보고 싶으셨나 보다. 87살이 되던 해 치매가 찾아왔다. 초기에는 잘 몰랐다. 그저 노인이니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할머니가 압력밥솥에 불을 올렸다가 솥을 통째로 태워먹자 자식들의 걱정은 커졌다. 얼마 뒤 할머니는 부엌을 통째로 태웠다. 불이 안방으로 번질 뻔한 아찔한 사고였다. 자식들은 마을에서 가까운 식당을 찾아 할머니 할아버지 부부 앞으로 하루 세끼 도시락을 배달시켰다. 6가지 찬에 따끈한 밥과 국이 포장된 정갈한 도시락을 보면서 자식들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당분간은 안전하시겠지.'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됐다. 할머니는 사람을 점점 못 알아봤다. 누가 가도 손자의 이름만 불렀다. 내면의 한도 터져 나왔다. 70년간의 결혼생활 동안 할아버지한테 푸념 한번 하지 않던 할머니는 미워 죽겠다는 듯 할아버지를 때렸다. 할머니의 한풀이에 90살을 넘긴 할아버지는 몸에 멍이 들도록 맞으며 평생의 죄를 갚고 있었다. 더이상은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정신이 온전한 할아버지는 요양원에 맡기고 할머니는 삼남매가 나눠서 돌보기로 했다. 큰아들네 두달, 작은아들네 두달, 셋째네 두달. 딸 둘과 외국 사는 막내아들은 순번에서 제외됐다.

우리 집이 첫번째였다. 아버지가 큰아들이다. 아버지는 소똥 냄새 나는 고향과 참기름 향을 풍기는 할머니를 사랑했지만, 치매 걸린 노인을 돌보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잠시 눈을 떼면 사고가 났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이 사라져 있고, 때론 무선전화기가 냉장고 안에 있었다. 책상 위에는 흙 묻은 아버지 신발이, 옷장에서는 반찬통이 튀어나왔다. 할머니는 입만 열면 '집에 가서 니 아버지 밥해줘야지'라고 소릴 지르며 신발을 신었다. 서울의 아들집은 할머니에겐 그저 남의 집이었다.

식사도 문제였다. 평소에는 반찬이 없어도 그럭저럭 버티던 아빠가 예민해졌다.

"평생 처음으로 어머니를 모시는데 반찬이 이게 뭐야. 노인네가 이걸 어떻게 씹어!" 워킹맘인 엄마도 지지 않았다. "열두시까지 일하고 들어와서 밤새 만든 건데, 싫으면 당신이 직접 하든가." "그게 지금 말이야?" "말이 아닐 건 뭐야. 그렇게 어머니, 어머니 하더니 한달을 못 참고 나한테 짜증 내잖아."

가족들은 점점 지쳐갔다. 아빠는 운영하던 가게 문을 닫고 할머니 수발에 나섰지만 본래 간호에는 소질이 없는 사람이다. 할머니와 있으면서도 그저 주무시길 바랄 뿐 달리 간병인 구실을 하지 못했다.

사라진 할머니를 찾고 나서
우리는 주저앉아 울었다
부모를 고작 두 달 모시고
피폐해진 게 부끄러웠다

고집불통 할매는 요양원에서
생기도 사라지고 얌전해졌다
그래도 우리는 할 말이 없었다
여기서 쫓겨나면 갈 데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가 사라졌다. 덥다고 문을 열어둔 게 화근이었다. 집에 돌아오자 사색이 된 아빠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20층도 넘는 아파트에서 노인이 어떻게 내려갔을까' '엘리베이터도 못 타고 길도 모르고 자식도 못 알아보는 양반이 어딜 갔나' '못 찾으면 어떡하지…'. 안 좋은 생각이 꼬리를 물자 우리는 모두 정신줄을 놓아 버렸다. 경찰에 신고를 하고 아파트와 집 주변을 나눠 샅샅이 뒤졌다.

그렇게 네 식구가 소리를 지르며 찾은 지 한시간 만에 할머니를 아파트 2층 계단에서 발견했다. 아빠는 할머니를 보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가긴 어딜 간다고 나갔어. 자식도 못 알아보는 양반이 왜 자꾸 간다고…." 아빠는 말을 잇지 못하고 울었다. 엄마도, 나도 울었다. 우리는 그저 복도에 주저앉았다. 평생 길러준 부모를 고작 두달 모시고서 피폐해진 것이 부끄러워서다. 할머니는 그 와중에도 '집에 갈라고'를 연발했다. 밤 기온이 30도까지 올라갔던 그날 밤 우리는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창문까지 닫고 누웠다. 치매 앞에서 네 식구는 무력해졌다.

그렇게 생채기를 남기고 난 뒤에야 지방에 있는 한 치매노인 요양원을 구할 수 있었다. 허름한 요양원에 있던 할아버지까지 모시고 왔다. 요양원비에 기저귀, 간식비 등을 포함해 한달에 한분당 150만원이 들었다. 이 역시 6남매가 나눠 내기로 했다. 돈으로 해결할 수만 있다면 감사해야 했다.

요양원에 들어가면서 할머니는 허리까지 길었던 머리를 짧게 잘랐다. 늘 은비녀로 곱게 정돈한 머리의 할머니는 사내아이처럼 짧은 머리가 됐다. 그런 머리가 감기기 쉽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찾아간 할머니는 유난히 조용했다. 목욕은 일주일에 두번, 밥도 잘 나오고 간식도 드신단다. 한데 생기가 사라졌다. 꼭 호되게 혼난 어린이집의 아이 같았다. '집에 가서 니 아버지 밥해야제'를 연발하던 고집불통 할매는 없고 얌전한 요양원 노인이 앉아 있었다. 밤에 잠을 안 주무셔서 약을 좀 먹였다는 얘기도 있고, 집에 가겠다고 하도 고집을 부려서 안정제를 투여했다는 말도 들려왔다

 

그래도 우린 할 말이 없었다. 고작 두달 만에 두손 두발 다 들어버린 것들이 자식이라고 와서 '왜 어머니를 함부로 대하느냐'고 말하는 건 자기기만이었다. 여기서 쫓겨나면 갈 데가 없기도 했다. 엄마와 아빠는 그저 요양원 보호사 선생에게 용돈을 쥐여주며 "잘 좀 부탁드린다"고 얘기했다. 나는 "할머니 미안해"만 반복했다.

쓸쓸하게 돌아섰다. 자주 오겠다고 말했지만 요양원을 나서는 순간 우리는 저마다 지고 있던 삶의 짐을 다시 떠올렸다. 할머니에게 느꼈던 미안함은 내일 출근, 모레의 실적 마감, 다음주에 있을 시험에 대한 걱정으로 곧 사라졌다. 잠시나마 효자이고 싶었던 우린 그렇게 또 불효자로 살아가고 있다.

할머니 뒤에서 우는 불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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