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9. 11. 10:41 짧은글 긴여운
절대 포기하지 마라 라는 메일 속 사진을 보면서
아래 내용은 과거 무심코 지나친 그림이었는데 오늘은 꽤나 내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마도 경영환경이 어려워 눈 앞에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태라서 더 다가왔는지도 모릅니다.
남들 보기에는 저의 자라온 과정이 어려움 없이 편하게 온실 속에서 자란듯 보이겠지만
남모를 어려움 일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이란게 우리 세대에서 겪는 일상적인 일이라보고 보면
제가 생각해 봐도 남들에 비해 어느 정도 순탄하게 살아온 인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무슨 일을 만날 때 마다 상대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 몇가지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남의 일은 다 쉬워보인다"라는 생각과 함께
"한 발자국만 물러나면 여기가 천국인 것을"이라는 큰 스님이 제게 주신 말슴입니다.
이제 그 큰 스님을 뵐 수는 없지만 제 마음 속에서 이렇게 늘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이 두가지 생각만 하면 이해되지 않던 상대의 행동이나 말이 어느 정도 이해되고
그 이 후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거기에 " 나도 그럴수 있겠다"라는 생각을더하면 금상첨화격으로 ...
딸 아이가 추석에 서울 집을 다녀갔습니다.
저는 중국에 있어서 서너차례 전화로만 얘기를 나누웠습니다.
개인적인 얘기와 서로의 느낌과 마음을 전했는데
다시 기숙학원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날 밤늦게 제게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진로!. 대학의 전공을 선택한다는 게
평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선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전화를 받고서야 나는 딸 아이의 전공에 대해서는 그리 큰 고민을 해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전화를 끊고 나서는 한참 동안 제 자신을 되돌아 보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어쩌면 그 전공에 대해 녀석의 평소 생각을 잘 알고 있기에
나는 어떤 의미에서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고 핑게삼아 위안을 삼아 보기도 했지만.
과거 대학에서 전공을 선택하던 내 경우만 돌아보면.
제가 화학을 전공해서 화학 공장에서 근무할 줄은 꿈에서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친구 따라 강남간다'고 함께 Group Study를 하던 동기들이
대부분 화학전공으로 가기에 나도 그만 그렇게 덩달아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한 친구는 다른 과를 선택해서 지금은 그 길로 잘 살고 있습니다)
물론 화학이 그리 싫지는 않았습니다,
이 말은 화학을 전공으로 선택할 만큼 좋아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 때 유행(일종의 신학문)이던 전산통계학과를 가려고 마음 먹었었는데..
그런데 다행히 대학원에 진학하고 나서야 화학이 재미있어졌습니다.
오년전 쯤, 여수 공장에서 근무할 때 고등학교 써클 모임 일년 후배가 찾아왔습니다.
환경청에 근무하는데 다른 공장에 환경지도 감독을 나왔다가 내가 궁금해서 들린 것이라는 데...
그 다음에 다시 만났을 때 녀석은 너털웃음과 함께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난 형이 공장 근무복을 입고 있을 줄은 꿈에서도 생각해 본적이 없어서
형의 모습이 굉장히 낯설었다"고
그런데 선택의 결과는 아무도 모릅니다.
앞으로도 얼마나 빠르게 시간이 흐르고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어쩌면 지금 아이들의 생각과 선택이 더 맞을지도 모르겟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도 선택한 자신의 몫으로 주어지기에.
본인이 저울질하는 두 가지의 전공은 다 좋은 데
자세히 들여다 보면 우리가 즐겨 사용하는 용어로 "General 이냐, Special 이냐" 입니다.
기성세대는 아무래도 안정성을 화두로 "General" 을 선호하고
요즘 아이들은 자신들이 좋아고 즐길 수 있는 " Special" 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성세대들은 과거 삶의 경험으로 "Risk 를 최소화"하는 관점에서 보는 시각차가 아닐련지,
마치 나이들면 자신도 모르게 보수화 경향을 띠는 것 처럼...
가족들이 있고 지금까지 내가 쌓아 온 것들이 무너지지않도록 본능적으로 "변화"를 싫어하는 것이지요.
아직까지는 개인적인 사고로 "보수 보다는 진보"에 더 가깝지만
가끔은 중도에 가까워졌음을 스스로 느끼꼰 합니다.
이제 아이들의 장래 뿐만 아니라
내 자신에 대한 장래에 대한 고민이 조금씩 조금씩 늘어갑니다.
갈수록 고요한 묵상이 조금씩 더 필요할 시기입니다.
<이하 e-mail 그대로 옮김>
이 그림을
쳐다보곤 용기를 얻습니다. 여러분들도 한번 해보세요.
내게는 오래된 그림이 한 장 있다.
오래 된 일이라 누가 보내 줬는지 잊어 버렸다.
자본도 없이 망한 식품점 하나를 인수해서 온 식구들이
이리저리 뛰어 다니던 이민생활 초기였다.
휴스톤에 사는 미국 친구인 것 같은데 누구인지는 가물가물하다.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죽을 힘을 다 해 황새의 목을 조르고
있는 이 한 컷 짜리 유머러스한 그림은 내 책상 앞에 항상 자리 잡고 있다.
그림을 설명하면,
잡풀이 깔린 호숫가에서 황새 한 마리가 개구리를 막 잡아내어 입에 덥석
물어넣은 모습이다.
개구리 머리부터 목에 넣고 맛있게 삼키려는 순간,개구리를 삼킬 수도 없게 되었다.
나는 지치고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이 그림을 들여다보곤 했다.
이 그림은 내가 사업적인 곤경에 빠졌을 때
무슨 일이든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가족이 운영하던 사업이 차츰차츰 성장을 하면서 가족의 노동력에 의존하여
돈을 버는
구멍가게의 한계에서 벗어나 보려고 새로운 사업에 도전했다가재산 보다 많은 빚을 가지고 미국이란 나라에서
절망감이 온 몸을 싸고 돌았고 ,
어느 수요일, 아침 저녁으로 지나가는 길에 있던
주머니를 뒤져 보니 68불(68만 불이 아니다) 정도가 있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매일 아침마다 그 회사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매출은 1년 만에 3배가 오르고 이듬해는 추가 매장도 열었다.
만약 그때 내가 절망만 하고 있었다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내가 그 개구리처럼 황새의 목을 움켜지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우리는 삶을 살아가며 수많은 절망적인 상태에 놓이게 된다.
결코 다가서지 못할 것 같은 부부간의 이질감,
평생을 이렇게 돈에 치어 살아가야 하는 비천함,
실패와 악재만 거듭하는 사업,
원칙과 상식이 보이지 않은 사회정치적 모멸감,
이런 모든 절망 앞에서도 개구리의 몸짓을 생각하길 바란다.
요즘 우리 인생은 불과 내년 예측도 할 수가 없다.
나는 과연 내년에도 이 일을 하고 있을까?
나는 과연 내년에도 이 곳에 살고 있을까?
나는 과연 내년에도 건강하게 살고 있을까?
격랑의 바다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 모두에게
나는 이 그림의 제목을“절대 포기하지 마라.” 라고 붙였다.
황새라는 운명을 대항하기에는
개구리같은 내자신이 너무나 나약하고 무력해 보일 때가 있다.
그래도 절대 포기하지 마라.
당신의 신념이 옳다고 믿는다면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운명이란 투박한 손이 당신의 목덜미를 휘감아 치더라도
절대로 포기 하지 마라.
여러분도 오늘부터 마음속에 이 개구리 한 마리를 키우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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