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연히 알게 되었다.
김환기 화백의 부인이 김향안이고
시인 이상의 부인이었던 변동림여사라는 걸...
혹시 김환기 화가에 대하여 궁금하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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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무엇이 되어 만나랴 김환기작품
저녁에 김광섭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http://click4tea.tistory.com/441.
변동림과 김향안
변동림의 나이많은 이복조카인 화가 구본웅은 친모가 산후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후 계모의 손에 자랐다. 계모 변동숙은 구본웅을 지극정성으로 키웠다. 그런데 변동숙의 아버지가 훗날 새장가를 들어 자신과 스물여섯 살이나 차이가 나는 이복여동생을 낳았다. 그녀가 바로 변동림인데, 연상의 조카 구본웅의 친구 이상과 커피를 마시고 데이트를 하면서 문학을 논하다가 사랑에 빠졌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와 결혼하겠다고 결심했다.
이상이 폐병을 앓고 있음을 아는 변동숙은 펄펄 뛰며 반대했지만, 변동림은 1936년 6월 이상과 결혼을 강행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고, 그래서 이상의 호적에는 변동림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부부에게 신혼의 즐거움은 잠시뿐이었다. 폐결핵은 점점 심해졌고, 구본웅은 천재이자 연하의 이모부인 그가 그렇게 허망하게 삶을 마감하도록 놔둘 수 없다며, 일본으로 가서 요양하라고 돈을 건넸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액수는 아니었기에 이상 혼자 일본으로 떠났다. 결혼 4개월 만인 1936년 9월의 일이다.
일본에서 요양하던 이상은 1937년 2월 공원을 산책하다 ‘불령선인(不逞鮮人, 명령을 듣지 않는 조선인)’이라는 죄목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옷차림이 허름하거나 용모가 단정치 못한 조선인은 무조건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되던 시절이었다.
이상은 니시칸다 경찰서에 34일간 구금되었는데, 이때 건강이 다시 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악화되었다. 얼마 후 변동림은 도쿄에 거주하는 이상의 친구에게 빨리 일본으로 오라는 전보를 받았다. 도쿄 제국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한 이상이 매우 위독하다는 내용이었다.
이상은 변동림이 병원에 도착하고 며칠 후인 1937년 4월 17일, “멜론이 먹고 싶소”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변동림은 수필 〈월하의 마음〉에서 이상의 마지막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철없이 천필옥에 멜론을 사러 나갔다. 안 나갔으면 상은 몇 마디 더 낱말을 중얼거렸을지도 모르는데. 멜론을 들고 와 깎아서 대접했지만 상은 받아넘기지 못했다. 향취가 좋다고 미소짓는 듯 표정이 한 번 더 움직였을 뿐 눈은 감겨진 채로. 나는 다시 손을 잡고 가끔 눈을 크게 뜨는 것을 지켜보고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우리 근대문학사의 천재는 이렇게 박제가 되었다. 21세에 청상(靑孀)이 된 변동림은 이상의 유골을 안고 현해탄을 건너 미아리 공동묘지에 매장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묘소는 유실되었다. 훗날 변동림은 이상의 죽음에 대해 “그는 가장 천재적인 황홀한 일생을 마쳤다. 그가 살다간 27년은 천재가 완성되어 소멸되는 충분한 시간이다”라고 회상했다.
변동림은 당시 자유연애라는 명목으로 ‘첩살이’를 하던 대부분의 모던걸들과는 달리, 이상의 ‘본처’였다. 그러나 이상이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고 7년 후, 자녀가 셋이나 있는 화가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 1913~1974)와 살림을 차렸다. 모던걸에게는 본처살이나 첩살이 같은 명분보다는 ‘불타는 사랑’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김환기의 자녀는 딸만 셋이어서 양자를 들였는데 그의 이름은 김화영이며 최근 유작반환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했다. 본글의 댓글참조. 충북일보 18.07.01 자 신문)
변동림이 김환기와 동거를 시작하자 이복언니 변동숙은, 부인이 있는 김환기의 첩살이를 하는 건 결국 본부인을 내쫓는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라며 결사반대했다. 이에 변동림은 변씨 가문과 아예 인연을 끊겠다며 이름을 김향안(金鄕岸)으로 바꿨고, 얼마 후 김환기는 본부인과 이혼했다.
근대 추상미술의 선구자이자 현대미술사에도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화가 김환기는 이렇게 이상에 이어 구본웅의 이모부가 되었다. 김향안과 김환기는 근원 김용준이 살던 성북동 ‘노시산방’에서 신접살림을 차린 후 집 이름을 ‘수향산방(수화 김환기와 향안이 사는 집)’으로 바꿨다.
김향안은 1955년 김환기와 함께 프랑스 유학길에 올라 미술평론을 공부했고, 1974년 김환기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환기재단을 설립해(1978) 김환기의 예술세계를 알리는 데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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