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을 알리는 "땡"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비상계엄령 확대 방송 그 시각 부터 비극 드라마
그러나 한편으로는 역사의 한 획을 긋는 518(오일팔 민주화운동)의 시작날이다.
그 때... ...
5월16일 도창광장의 평화시위를 마치고
그 다음 날도 전날 평화 시위의 여운은
폭풍 속 고요처럼 숨죽이고 있었음을
(전국의 모든 대학이 민주화시위를 그만두었음에도
광주만큼은 전두환타도를 외치면서 시민들과 함께 했다.)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은 다 느끼고 있었을게다.
그래서 그 다음 날 계엄이 확대되면
학교 정문으로 모이자는 말로 끝이 났고
그 와중에 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행복의 실랑이 속에서 잠을 청하던 중 원하지 않았던
518 비상계엄 선포를 자정과 함께 라디오를 통해서 들었다.
그 아나운서 목소리와 함께 떨리는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5.18일부터 석가 탄신일(21일)의 연등은
어느새 붉은 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친구 한녀석은 게엄군 개머리판에 맞아 이빨이 나가고...
다른 친구는 팔을 다치고...
그리고 5.19일이 지나고
20일 오후넘어 난 광주를 떠났다.
그리고 5.27일 도청이 게엄군에게 넘어가고
그렇게 어둠과 피로 불든 광주에, 광주로 돌아 왓다.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날
맨 먼저 그나마 걸을 수 있는 광주 충장로를 걸었다
그 당시 스치우듯 지나는 시민들의 얼굴 표정은 내평생 짐이다.
웃음이 사라진 그 무표정한 얼굴.
만나는 이들마다 약속이나 한듯 똑 같은 얼굴
사십년이 다되어가도 여전히 잊혀지지 않는다.
그 후 도청 앞 신문게시대에서 광주매일신문에 쓰여진
김준태 시인의 "광주여.... "라는 시를 보았다.
같이 그 시를 본 시민들은 하나같이 울고 있었다.
그리고 친구 몇이서 화순 운주사 와불 앞에 앉아서 한없이 울었다.
긴 108일의 대학 일학년의 휴학이 해제되고
겨울방학도 없이 보충 수업이 진행되고
나의 대학1년은 그렇게 지나갔다.
<1980.5.16 그 전남도청앞 분수대... 이 군중들 남서쪽 어딘가에 제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