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길 마천 근처에서 2009. 8월>

푸르른날 유투브 바로가기.EBS공감Space
https://www.youtube.com/watch?v=Vx_4Rt0he4Y&sns=em

          푸르른 날

            서정주 詩, 송창식 작곡, 노래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나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노래 탄생 이야기 ]

중학생 때 미당 만난 송창식 …'푸르른 날''선운사' 만든 사연

2000년 10월, 당시 중앙일보 문학기자 이경철씨가 미당(未堂) 서정주(1915~2000) 시인의 집을 찾아갔다. 타계 두 달 전 병석의 미당은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 푸른 하늘을 보시라"는 기자의 말에 이렇게 대답했다.

 "송창식군 노래를 말하는구먼. 그 사람 노래 참 기막히지. 내 시에 곡을 붙였다며 기타까지 메고 집으로 찾아와 노래를 부르는데 후련하게 확 터진 소리면서도 뭔가 서럽지 않았겠는가. 그렇게 눈부신 푸르름 속에도 설움이 있는데 우리 삶이야 오죽 서럽고 불쌍하겠는가."

히트곡 '푸르른 날'을 두고 한 말이다.
송창식은 중학생 시절 미당을 처음 알게 됐다. 인천의 한 고등학교에서 열린 문학의 밤 행사에서 우연히 미당의 특강을 들었다.

"시를 쓰는 방법을 일러주셨어요. 순간의 시상을 바로 옮기면 좋은 시가 안 나온다고 하셨죠. 감동의 알맹이를 차곡차곡 쌓아 나중에 책상 앞에서 풀어놓아야 한다는 말씀이셨죠. 제 작곡에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쳤고요."

20여 년 뒤 송창식은 시인 문정희씨와 함께 미당을 방문하게 된다. 그때 미당은 "내 시 중에서 '푸르른 날'이 노래로 빚기에 좋다"고 했고, 송창식은 "제가 만들어 보겠습니다"고 선뜻 나섰다. 원래 시가 대중가요로  쓰이는 걸 싫어하던 미당이 송창식에게 허락하는 뜻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후 이에 감사하는 의미로 미당에 대한 헌사(獻辭) 차원에서 '선운사'의 노랫말도 썼다.

참고로 미당은 일제에 부역한 친일시인이자 전두환에게도 헌시를 한 시인이기도 하다.

위사연에 대하여 더 자세히 보려면
송창식과 서정주 그리고 푸르른 날 바로가기 클릭




              
Posted by 한글사랑(다향)
 혼자가 아닌 나 ...드라마 "눈사람" 中에서 서영은

2009.09.23 06:36 다향 한글사랑 

카테고리:좋아하는 노래와 음악

 언젠가 이 노래를 듣고서 가사가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 당시 제게 힘을 주는 노래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제 핸드폰의 컬러링이기도 했었는데

어느 날 아내가 이제는 바꿀 때도 된게 아니냐고 해서 그만 해지를 했습니다.
 
한참 뒤에 몇 분이 제게 전화를 걸어오면서

이 노래 제목을 물어오면서 전화를 걸면 힘이되어주는 노래였는데

많이 아쉽다는 얘기를 해오기도 했습니다.

현재 제 블러그의 배경음악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가사를 그냥 읽어도 참 좋습니다.
         
 물론 이 노래 배경이 되어주던 드라마 "눈사람"은 

처제와 형부의 사랑 이야기이지만 
그냥 눈감고 이 가사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090923>

유투브로 바로 듣기
https://www.youtube.com/watch?v=KmOBG1KKmdE&sns=em

음악은 표시되지 않습니다.

 <인터넷에서 퍼온 그림>


         혼자가 아닌 나
                                서영은

 이제 다시 울지 않겠어 더는 슬퍼하지 않아
 다신 외로움에 슬픔에 난 흔들리지 않겠어
 더는 약해지지 않을께 많이 아파도 웃을꺼야 
 그런 내가 더 슬퍼보여도 날 위로 하지마

가끔 나 욕심이 많아서 울어야 했는지 몰라
행복은 늘 멀리 있을때 커 보이는 걸 

힘이 들땐 하늘을 봐 나는 항상 혼자가 아니야
비가 와도 모진 바람 불어도 다시 햇살은 비추니까
눈물나게 아픈날엔 크게 한번만 소리를 질러봐
내게 오려던 연약한 슬픔이 또 달아날 수 있게

가끔 어제가 후회되도 
나 지금 사는 오늘이 내일보면 어제가 되는 하루 일테니

힘이 들땐 하늘을 봐 나는 항상 혼자가 아니야
비가 와도 모진 바람 불어도 다시 햇살은 비추니까
눈물나게 아픈날엔 크게 한번만 소리를 질러봐
내게 오려던 연약한 슬픔이 또 달아날 수 있게

앞만 보고 걸어갈께 때론 혼자서 뛰어라도 갈께.
내게 멈추던 조그만 슬픔도 날 따라오지 않게


[드라마 눈사람, 2003. TV드라마]
주인공 연욱(공효진)은 언니 연정 (오연수)의 약혼자인 필승(조재현)을 보고 반하지만, 곧 언니와 결혼하여 형부가 된 필승에 대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깊이 숨긴다. 이런 연욱의 마음을 얻으려 하는 남자가 성준(김래원)이고, 현실적인 불가능함 때문에 연욱도 성준에게 마음을 열려고 한다. 그러다가 언니 연정이 도중에 사고사했고, 이후 필승-연욱-성준의 삼각관계가 형성되다가 결국 필승이 연욱의 마음을 받아 주어 재혼하고 아이를 낳는 것으로 끝난다.
Posted by 한글사랑(다향)
 옛 백제의 수도 부여를 다녀와서 2

2004.05.20 21:47 다향 한글사랑

앞선 부여 답사기에 이어서 마무리를 하고자 합니다.

앞서 말한 공원은 구드래 공원 ( 백마강의 나루터 명칭이지만 구드래의 본래 뜻은 지금도 궁금합니다. 국어 사전을 찾아 보았지만 .. ) 이었습니다.

선착장에서 내린 후 현재도 발굴지로 지정되어 발굴이 한창인 곳을 지나서 주차장까지 이동을 했습니다.
 
남는 시간에 마지막 여행지는 생육신의 한사람인 김시습이 말년에 스님으로 사시던 곳인 무량사는 사진으로만 보아도 그 호젓한 길을 걷고 싶었지만 부소산성의 산길은 그당시의 아픔을 느끼고 되삭이기에 충분하였지만

평소의 운동이 부족한 아내에게는 조금 부담이 되어 근처의 성흥산성을 답사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외딴곳의 문화유적은 이정표가 부실해 항상 헤매이기 마련인데 이번에도 역시 그 평범한 진리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헤매다가 들린 성흥산성은 헤맨던 기분을 말끔히 씻어주기에 충분한 보람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성흥산성은 백제 동성왕 때 왕명으로 좌평 백가가 지은 성으로 백가는 동성왕을 공산성에서 시해했다가 결국 죽임을 당한 사연을 지닌 성입니다.

깍아자른듯한 절벼의 단애와 함께 천헤의 요새로 당나라장수 유인괘가 두려워 했던 이유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정상 말미에 도도하게 서있는 노거수는 옛사람들의 자취와 함께 역사를 자연스레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정상에 오르는 중에 고려개국공신 유금필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어 어리둥절 했으나 안내문에는 유장군이 임천을 다스릴 때 굶주린 백성들을 도와서 그 때부터 산사람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는 안내문은 옛 민중들의 수탈과 그 고마움에 대한 순수함을 느끼게 해주었는데 10 m 위에 있는 인위적인 팔각정은 아쉬움이 그득했습니다.
 
이 산성에 들리면 반드시 대조사를 들려야 합니다.

커다란 새가 날아 들어서 그 터에 지어 그래서 대조사 라는 절이름이 범상치않게 느겨집니다.

조금 유명하다 싶으면 으례 새로지은 건물에 다소 거부감을 느끼는데 이 절은 아직도 새건물이어도 다소곳함을 느끼게 하여 아내와 함께 그 절의 아늑함과 그 호젓함을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다만 틀어놓은 불교방송소리는 내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미륵을 모신절이고 절 뒷편의 미륵 부처는 익산의 은진미륵처럼 심한 불균형이지만 보면 볼수록 나도 그에 동화되어 옛사람들이 친근하게 의지하고 빌었을 그마음으로 되돌아 갑니다.

흡사하였지만 그 높이가 십미터 정도로 옆에 서보니 참 친근하게 느껴져서 아이들과 함께 한참을 서있었습니다.

최근들어 이 대조사를 다시 가보고 싶은 절에 하나 더 추가하였습니다.
 
이어서 시내들러 고드래 돌쌈밥집... 그이하는 동일합니다. 

       2003.  04.02
Posted by 한글사랑(다향)
 강화도 전등사를 다녀와서

먼저 오래전 글을 옮겨왔다는 점 이해해 주시길...

2004.05.20 21:00 다향 한글사랑 

서울로 올라 와서 좋은 점을 고르라면
저 아래 남도에 살면서 거리를 핑게로 가 보지 못했던 곳이나
다시 가 보고 싶은 곳을 애써 멀리해야 한다는 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 일게다.

그런데도 막상 서울로 올라 오니
그것 또한 생각과 달리 만만하지 않았다.
물론 여수에 있을 때 보다는 멀리 떠나는 횟수는 줄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는 많이 가 본 것은 사실이기는 하다.

지난 선거일에는 일찍 선거를 마치고 강화도 전등사엘 다녀왔다.

서울와서 한강 다음으로 간 곳이 인천 영종도와 강화도 마니산이었으니
그 동안 강화도는 몇 번 들렸지만 전등사는 먼 곳의 상상이었다.

서울로 되돌아가는 길의 밀리는 교통지옥을 아래 살 때에는 상상도 못했을 그 이상을 넘어서는 것이기에 웬만한 인내로는 넘기 힘든 벽이 되었다.

광성보, 초지진, 덕포진,등
그래도 갈만한 곳은 다 들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초지진대교가 완공되어 강화 쪽으로 가는 국도의 국 심한 교통 체증을 피하면서 여유롭게 짧은시간에도 다녀올 수 있기에
그동안 미뤄두었던 전등사를 들렸다.

고구려때 고승 아도 화상이 창건하여 1266년 고려 원종 7년에 중창했다는 절. 전등사.

멀리 보성 문덕의 대원사도 아도화상이 지었다는데

그 시대 스님들은 절만 짓다가 세월을 다 보냈나 보다.

전등사 대웅전은 보물 178호로 1615년 조선 광해왕 7년에 다시 지경화상이 기공하여 1621년에 완성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본 건물 위 추녀 끝에 나열된 보주와 귀기둥 제공 위에 조각된 인형물과 내부 불단상에 건조된 닷집이 풍부하고 다채롭게 투각한 장식과 부룡 , 극락조등은 다른 건물에서 볼 수 없는 것으로 조선 중기의 특이한 대표적인 건물의 하나로 탱화가 없는 소박미를 보여 준다.


어디서나 마찬가지이지만 절 뒷편의 오르막에서 내려다 보는 절집은 항상 아늑하면서 묘한 조형미를 갖는다.

혹시 절에 들리면 절 뒷편의 조금 높은 곳에서 가람의 배치와 조형들을 살펴보기를 권한다.

기대 이상으로 많은 것을 느끼고 편안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전등사는 혹시 크기를 기대하고 간다면 알려진 이름에 비해 초라할 정도로 아담스러워 실망일게다

더하여 이 곳에서는 반드시 전등사 외부 성곽 위를 거닐어 보기를 ... 
그러면 걷는 동안에 천연 요새지에 자연을 그대로 이용한 성곽의 지혜와 함께 자신도 모르게 소단해질 것이다.

아이들을 남겨두고 아내랑 둘이서만 잠시 다녀온 전등사

차 한 잔의 여유처럼 아름다웠다.

비록 아늑하고 아름다운 죽림다원 차를 마시지는 못했지만

[ 강화도 정족산 전등사(傳燈寺)소개 ]

대웅전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성(鼎足山城)내에 있는 사찰.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에는 강화도의 주봉을 이루는 마니산이 있고 이 산의 한 줄기는 북동쪽으로 뻗어 길상면 온수리에 이르러 다시 세 봉우리를 형성하였는데 이것이 정족산이다.

전등사는 바로 이 정족산성 내에 있는데, 1977년에 복원된 삼랑성의 남문이 현재 전등사의 출입문으로 이용되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傳燈本末寺誌}에 전등사창건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제 1편 1장의 전등사지에 의하면 이절이 본래 고구려 소수림왕11년(381)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개산(開山)하고 진종사라 이름붙였다하고,

그뒤 고려 원종7년(1266)에 사승(寺僧)이 이 절을 다시 창건하였다 한다.

그러나 강화도가 고구려영토가 되는것은 소수림왕11년보다 거의 1백년이 지난뒤인 장수왕 63년 (475)의 일이다.

아직 백제에는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해오지도 않았는데(384년에 전해옴) 백제영토인 강화도에 절이 세워졌다는것은 아마 후세 사람들이 잘못 윤색해 놓은 허구일 것이다.

다만 원종7년(1266)의 중창기사는 믿을만하다고 보아지며 (동국여지승람)권12, 강화 전등사조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원 세조(元世祖) 지원(至元)19년, 즉 충렬왕8년(1282)에 충렬왕 원비(元妃) 정화궁주 (貞和宮主) 왕(王)씨가 승려 인기(印奇)를 시켜 바다를 건너 송(宋)에 들어가서 대장경을 인쇄해 이절에 보관하게했다는것이다.

그리고 {江華府志}에서는 부처님 앞에 불을 밝히는 옥등잔도 역시 정화궁주가 보시(布施)한것이라고 했는데

{전등본말사지}에서는 옥등잔을 헌납함으로써 절 이름을 고쳐 전등사라 사액(賜額)하였다고 일컫고있다.

그 뒤 1337년(충숙왕 복위 6년)과 1341년(충혜왕 복위 2년) 이 절의 승려들이 중수하 였다.

1605년 (선조 38년) 불이 나서 전체 건물의 반 가량이 타버렸고, 1614년 (광해 군 6년) 12월 또다시 불이 나서 나머지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이듬해 4월 지경(志敬) 등이 중심이 되어 재건을 시작하여 1621년 2월 옛 모습을 되 찾았다.

1678년(숙종 4년) 조정에서 실록을 이곳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사고(史庫)를 지키는 사찰로서 조선왕실의 비호를 받게 되었고,

 1707년 유수(留守) 황흠(黃欽)이 사각 (史閣)을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翠香堂)이라 이름하고 보사권봉소(譜史權奉所)로 정하였으며,

1719년 이 절의 최고승려에게 도총섭(都摠攝)이라는 직위 를 부여하였는데, 이는 1910년까지 계속되었다.

1726년(영조 2년) 영조가 이곳에 와서 취향당의 제액(題額)을 써주고 고쳐 걸게 하였 으며, 1734년 곡식 수십석을 하사하였다.

또한 1749년 2월 이 절의 중수불사(重修佛 事)가 당시의 총섭 초충(楚充)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는데,

중수에 쓰인 재목의 대부분은 영조가 시주한 것이며, 이때 대조루(對潮樓)도 함께 건립되었다.

또한 1761년 대연(大演)이 법당의 삼존불을 개금(改金)하였다. 1784년(정조 8년) 정 족창(鼎足倉)이 세워졌는데, 규모가 4,5칸에 불과하였으나, 1828년(순조 28년) 양곡 5,000석을 보관할 수 있는 40 - 50칸으로 확장되어 시설절목(施設節目)까지 마련되었다.

1839년(헌종 5년) 서룡(瑞龍)을 비롯한 14명의 승려가 시왕전(十王展)을 수리하고 담장 등을 보수하였다.

1841년 연홍(演弘) 등이 대조루를 중건하였고, 1855년(철종 6년) 규영(奎榮)등이 대웅전을 중수하였으나 이때 경제적으로는 큰 어려움에 빠져 있었다.

1871년(고종 8 년) 포량고(砲糧庫)를 이 절에 건설하였고, 1872년 승군 50명과 총섭 1명을 두고 진상약애고(進上藥艾庫)와 산성별장소(山城別莊所)를 절 남쪽에 건설하였으며,

1876년 에는 효월(孝月)이 대웅전과 약사전을 중수하였다. 1884년 3월 영담(映潭)이 관음암 을 중수하였고,

1905년 주지 서룡이 비로전의 불상과 약사여래 및 칠성탱(七星撑)을 개금불사(改金佛事)하였으며,

1909년 오랫동안 이 절에 보존되었던 사고장본(史庫藏本)을 서울로 옮겼고,

1910년 당시의 군수 한영복이 이 절에 전래되어오던 유물인 동향로를 궁내부에 바쳤다.

1912년 조선불교 30본산의 하나로서 강화, 개성 등 6개군에 소재하는 34사찰을 관리하는 본산으로 승격되었다. 초대주지는 김지순이었고, 2대주지는 국창환이었다.

1915 년 국창환은 국고보조를 얻어 대웅전을 중수하였고, 1916년 신도들의 기부금으로 시왕전과 대조루 등의 건물을 중수하였다.

1928년 3대 주지 이지영이 지장상(地藏像)을 개금하고 명부전을 다시 세우는 한편 적뭉당 30여칸을 수리하고, 식당 26탄의 기와를 바꾸는 대불사를 이룩하였다.

1932년 6대 주지 이보인이 국고보조금과 신도의 기부금으로 대웅전과 극락암을 중수하고, 적묵당, 강설당, 대조루, 명부전, 극락암 등을 중건하였으며,

8대 주지 김정섭은 1934년 전문강원(傳門講院)을 설립하고 안진호에게 부탁하여 사료를 모아 {전등본말사지(傳燈本末寺誌})를 편찬, 발행하였다.

이 절의 가람배치는 전형적인 산지가람의 배치를 따르고 있다. 출입문을 들어서면 바로 양헌수 장군 승전비가 서있고 약간 경사진 산길을 따라 오르면 북쪽으로 대조루에 오르는 계단이 보인다. 절 입구의 대조루를 지나면 정면 남향한 대웅전이 있고 그 주위에는 약사전, 명부전, 삼성각, 향로각, 적묵당, 강설당, 범종각 등이 있다.

보물 제179호인 약사전 내부에는 선정인(禪定印)을 취한 약사여래가 봉안되어 있으 며,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서 내부에는 지장보살살을 비롯한 10구의 시왕(十王), 2구의 귀왕(鬼王), 2구의 판관(判官), 2구의 녹사(錄事), 2구의 장군(將軍), 10구의 동자(童子) 등 29구의 존상이 있고,

1884년에 조성된 후불탱화가 있다.이밖에 향로전은 대웅전의 분수승(焚脩僧)이 거처하는 곳이고,

적묵당과 강설당은 본 래 대웅전에서 서로 마주보는 위치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두 건물은 선원(禪院)과 강원(講院)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중요 유물로는 보물 제393호인 범종과 법화경판이 있다. 범종은 우리나라 종과는 그 형태가 판이한 중국종으로서, 민족항일기 말기의 군수물자 수집공출 때에 빼앗겼으 나, 1945년 광복과 함께 부평에서 발견되어 다시 이 절로 돌아오게 되었다.

또한 법 화경판은 귀중한 장경판으로서 본래 105매 였으나, 1매는 6.25사변 때 파주의 모부대에서 가져갔다고 한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거대한 청동수조와 옥등이 있다. 청동수조의 유래는 잘 알 수 없으나 산화된 상태로 보아 고려시대의 유물로 보이며, 옥등은 대웅전 안에서 불을 켜던 것이다.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1호인 대조루에는 선원보각(瑄源譜閣), 장사각(藏史閣), 취향당 등의 편액이 남아 있고,

사찰 경내에는 70여년 이래로 은행이 한톨도 열리지 않았다고 전하는 수령 600년의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 삼랑성 전설 ] 사적 130호
강화도 남단 정족산 산등성이를 따라 단군의 세 아들 부소(扶蘇), 부우(扶虞), 부여(扶餘)가 쌓았다는 삼랑성(三郞城)이 있고, 전등사는 이 삼랑성 품속에 고즈넉하게 안겨 있다. 전설의 땅 강화도(江華島), 그 남단에 정족산(鼎足山)이란 산이 있고, 산등성이를 따 라 성(城)이 있으니, 이를 이름해 삼랑성(三郞城)이라 한다.
 
  2002. 12. 25
Posted by 한글사랑(다향)
백제 짚신 ‘ 볍짚 아닌 부들’로 제작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m
2004.6.20

백제 짚신은 일반적인 볏짚이 아니라 강변에 자생하는 여러해살이 풀인 부들(Typha)로 만들어졌으며, 형태도 전통적인 우리나라 짚신과는 달리 신발 바닥만 있는 구조로 일본 현대 짚신과 유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고대에 짚신 제작기술이 백제에서 일본으로 전해졌음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김용민)는 이같은 내용을 담은 연구보고서 ‘백제의 짚신’을 최근 발간했다. 책은 부여문화재연구소가 지난 1995년 이후 발굴해온 부여 궁남지유적(사적 135호)과 관북리백제유적(사적 428호)에서 출토된 백제짚신 64점의 분석을 통해 삼국시대 우리 조상이 신고 다녔던 신발과 관련된 생활문화의 한 면을 살펴본 기획·연구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백제 짚신의 출토현황에서부터, 짚·풀 문화의 민속학적 특징,짚신 유물의 과학적 보존처리 방법, 재질에 대한 과학적 분석결과 등을 담고 있다.

이번 연구에서 우리 현대 짚신같이 신바닥 앞에 세운 새끼 기둥인 앞총이 없이 가는 당김잇줄로만 묶은 백제 짚신은 신발 바닥만 있는 구조였음이 밝혀졌다. 인병선 짚풀생활사박물관장은 책에 실린 ‘백제 짚신의 특징’이란 글을 통해 “백제 짚신은 현대의 신발처럼 신을 신는 것이 아니라 풀이나 나무껍질로 발을 묶어싸던 원시적인 형태에서 조금 발전한 형태였던 것으로 생각된다”고 밝혔다. 

특히 신라 짚신도 앞총은 없지만 형태면에서는 우리 현대 짚신과 흡사한 반면, 백제 짚신은 일본 짚신과 유사해 일본문화의 뿌리가 된 백제문화와 삼국통일 후 확실히 우리문화의 뿌리로 자리잡은 신라문화의 역사적인 궤적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고 인 관장은 설명했다.재질면에서도 백제 짚신의 재료로 쓰인 부들은 현재 짚신의 주재료가 아니어서 부들 짚신은 백제 멸망후 전통이 단절됐을 가능성이 시사됐다. 거친 부들을 사용해 정교한 짚신을 제작한 것은 당시 사람들이 수준 높은 공예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란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문화일보
Posted by 한글사랑(다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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