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 5. 04:28 차한잔 나누면서
[인생명언] 좋은 말 ...
예쁜 너에게
좋은 말
좋은 말 100개를 들어도
나쁜 말 1개에 울적해져 버리는 게
사람 마음인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늘 너에게
예쁜 말만 해줄거야
네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네가 늘 웃을 수 있게
암환자로 투병 생활이 길어지면서 반대로 줄어드는 건 평소의 그나마 나름 자랑거리(?)였던 '인내심'이다 . 예전같으면 별일도 아니라고 무심코 넘기거나, 무얼 부탁하거나 심부름등을 시키거나 궁금한걸 묻고서는 그래도 나름(?) 여유있게 기다렸는데 요즘은 그새를 못 참고 한번 더 재촉이니 내가 봐도 큰 일은 큰 일이다. 원래 일이라는게 각자에게 순서가 있고 경중이 다르니 부탁을 해도 내맘같지 않다는 걸 종종 잊어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까지도 환자가 된다.
병을 안고, 그것도 암환자로 살아간다는 건 투병 생활이 길어질수록 남(보호자)에 대한 의존성이 커진다는 것이다 . 그래서일까? 환자이기 이전에 내게 있어 가능할 것 같은 일들을 내 스스로 하고싶어 하는 것은 어쩌면 마지막(?) 남은 내 자존감을 지켜내고 싶다는 기본적인 욕망인지도... .
간혹, 내가 능히 할 수 있는 어떤 조그마한 일 하나에도 누군가(보호자)가 해주겠다고 하면 나도 모르게, 심지어는 상대가 다소 민망해할 정도로 소리를 높혀 "내가 할께요" 라고 말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내가 할께요!"
그래서 이 말은 마지막 내 자존감 같기도 하다.
내 평소 몸무게 70kg 좌우에서 어느새 52.5kg으로 25% 정도 빠져 내가 봐도 깜짝 놀래는데...
뼈만 앙상하게 남은 나를 보면서 힘들어 보이는 거 하나라도 덜어주려는 아내의 속깊은 배려에도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질 때가 있는 것이다.
엊그제 항암치료를 위해 집을 나서려 옷을 갈아 입는데
갑자기 아내의 눈시울이 붉어졌고 이내 눈물방울이 방자닥에 툭하고 떨어졌다.
나는 아내에게 굳이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러자 아내가 그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나의 바짝 여윈 뒷모습이 너무 안스러웠다고 ...
1년하고도 3개월이 조금 넘었다.
보는 시각에 따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암환자로써의 생활이었다.
꼭 환자복만 입어야 환자인건 아니지만
병원에서 입게되는 환자복이 주는 획일성은 잠시 놓아두었던 일상의 자유에서 다시 환자라는 심리적인 가두리 안으로 나를 가둔다.
그리곤 그냥 두어도 될 것들로 다시 재생시키곤 한다.
투병생활이 길어질수록 만나는 사람들의 수와 폭이 줄어들고 있다. 그러다 보니 생각과 사고의 폭 역시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런 악순환은 갈수록 나의 생각을 편협하게 만들고, 내중심적 사고로 몰아갈 것이다.
더군다나 환자로써 조금은 이해받고 싶고, 보호받아야한다는 사회적, 심리적 통념까지 끼어들면 아주 사소한 것에서 주위 사람들과 마찰을 일으키게 된다. 즉 상대에 대한 배려에 대한 이해와 감사는 갈수록 줄어들면서 (당연시?) 내 생각 그리고 내 방식이 "더" 옳다는 착각 속에 빠지는 것이다.
여기서 굳이 "더" 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맨 윗글은 오래전에 글을 이어쓰려고 임시저장해 놓았는데 최근들어 과거 글이나 임시글들에 있어 수정이 불가한데다, 때마침 아내와 사소한 것들에서 다툼 아닌 다툼이 있어 새로이 되돌아 볼겸해서 다시 옮겼다.
다툼의 상처는 그 크기와 다소를 떠나 마음을 상하게하는 상처 자체로는 거의 동일하다고 봐야한다. 더군다나 그 상처를 준 이가 내편이라 믿은 사람에게서, 그것도 논리적으로 틀리지 않아 상대는지극히 객관적인 조언이라는데 충고나 조언이 아닌 내편을 원한 아내는 정작 상처를 받은 것이다.
그것도 남편인 나에게...
내편이라 믿었던 상대에게 받은 상처는 그 크기가 적어 마치 이삼분가량 누르면 멈추는 지혈처럼 금방 상처는 아물게 될 것이고 남들은 모를것이다. 그러나 사소한 것이라고 지혈을 소홀히 하면 피는 피대로 그리고 그 곳에 파란 멍이 들듯, 생각보다 그 상처의 후유증은 길게되고 그 멍으로 인해 바라지 않던 제3자까지 알게되기도 한다. 그 곳은 또 다시 상처와 지혈이 반복될 것이고, 결국 지친 혈관 스스로 숨어버리듯 생각지도 못할 일에 직면할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않으면 참을 수 없는 울화병같은 상처나 소소한 상처나 살을 에이는 아픔은 동일하다.
그래서 한번 더 생각해보는 약속이다.
십여년 전, 잊지않고 메일로 좋은 글을 전해주던 정혜신(심리상담사)님의 말이다.
“충조평판(충고·조언·평가·판단)을 하는 것은 필요하고 도움이 돼서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상대가 만만해서 하는 거다. 명확한 자의식을 가진, 개별적 존재로 의식하고 존중하면 그렇게 하지 못한다.”(정혜신)
'차한잔 나누면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马上" 에 대한 小考。 (0) | 2020.01.31 |
---|---|
하루가 행복하려면 (0) | 2020.01.08 |
봉사의 욕심... . (1) | 2019.12.25 |
퇴직을 정식으로 알리다. (0) | 2019.12.19 |
하늘 (2) | 2019.1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