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에서 길을 물었더니 : 우리시대 큰스님 33인과의 만남  서화동지음 / 은행나무
 

책꽂이에 꽂혀있는 책들을 흩어보다가 이 책을 다시 꺼내들었다. 아마 내 기억으로는  2003년 봄쯤에 한번 읽고서 그동안 눈길 한번 주지않다가 다시 뽑은 걸 보면 무언가 보이지 않는 인연이 나를 이 책으로 끌어당겼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선지식(善知識)이란 가르침을 설명하고 불도(佛道)에 들어 가게하는 사람. 바른 길로 이끄는 사람. 사람에게 태어난 참 의미를 가르쳐 주는 사람. 현자(賢者).“라고 말을 한다.

 이 책이 초판으로 나온지 벌써 17년이 지났으니 33인의 큰 스님 중 대부분의 스님들이 입적을 했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큰 스님들의 열반소식을 매스컴을 통해서 종종 듣곤 했다. 내가 아는(오로지 나만, 스님은 나를 모른다), 아니 관심있는 스님들은 대부분 열반하셔서 이미 한줌의 재로 화했다

선지식을 찾아서 큰스님들의 이야기를 엮은 이 책의 시작은 33인의 스님들이 언제, 어떻게 불교에 관심을 두거나 알게되었고 어떤 경로로 승가에 입적을 하게 되었는지 간단하게 그러나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왜냐면 어느 종교나 마찬가지이겠지만 그 출발점이 그 사람의 평생을 좌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종교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그 출발점에 이어 확철대오를 했는지, 그리고 견성을 보았는지 물어 본다.  그러면 스님들 마다 자기가 겪었던 일들을 말해준다.

그리고 마지막 말은 평범한 사람들도 수행을 하면 불성을 볼수가 있다고 말 한다.

수행과 깨달음을 통해 우주와 한몸이 되고 자연스레 욕심이 없어지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좋게되고 결국은 여여하게 된다고 이른다

이 책에 보이는 스님들은 한결같이 천진난만하고 마치 어린 아이와 같이 해맑게 웃는 얼굴로 대부분 바짝 마르셨고 느낌 자체가 사바세계에서 겪는 고뇌 번민 욕심 유혹을 멀리하고 다른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일단 내관점에서는 합격이다.

나는 오래 전 부터 종교인에 대한 편견을 하나 가지고 있다. 
목사님, 신부님,그리고 스님들은 몸이 비대해서는 안된다는 편견이다. 마땅히 남을 의해 헌신하고 수도생활과 함께 기도로 산다면 결코 살이 찔 틈이 없을 것이기에 살이 찐 종교인은 웬지 나태할 것 같아서이다. 나이들어가면서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완전히 이 편견을 버린 것은 아니다. 내 개인적인 편견의 희생양은 성철스님이다. 그 분의 견성을 존경하고 말씀을 좋아하지만 웬지....
오로지 내 개인적인 편견이다.

한편으로는 절간이 아닌 속세에서 수행을 하고 마음을 닦는것 또한 큰 수행이고 깨달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온갖 집착과 탐욕에 찌든 현대인들에게 이러한 수행과 깨달음은 딴 나라 얘기처럼 낯설기만 한것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래도  큰 스님들의 법문이 한줄기 맑은 바람이 될 것 같고 마치 도심을 벗어나 숲 한가운데에서 큰 스님의 가르침을 듣는 듯한 무상(無上)의 기쁨도 둔다.

 물론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하심(下心,마음을 내려 놓는 것, 비움)을 자극하여 한줌이라도 내려놓고 비울 수 있기를 큰 스님들이 바라지 않았을까? 라는 마음이다.

 이 책에 소개되는 서른 세분의 큰스님들의 생각과 말은 표현은 제각각으로 달라도 근본은 같다

 세인의 좁은 안목으로 가름하면 선승도 있고 학승도 있다. 견성(見性)을 했다는 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분도 있고, 염불이나 주력, 간경, 관법등 다른 방편도 충분히 유효한 길이라는 분도 있다. 그러나 누가 옳은지 판단하는 것보다는 선지식들이 치열한 구도행과 실천적 삶을 통해 체득한 지혜를 듣고자 할 뿐이며, 욕심과 집착을 털어낸 곳에 마음자리가 있다는 것, 분별하지 말고 상(相)을 내지 말아야 한다는것,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부유한 환경보다는 춥고 배고플 때 공부가 더 잘된다는 것, 공부는 젊은 시절에 해야한다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하심(下心)해야 한다는 가르침의 책이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각기 다른 길들이 있다. 그 많은 길들 중에서 자신에게 어울리는 길이 있을 것이고, 어느 길로 걸어가야 할지는 스스로 터득해야 할 것이다.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이 과연 옳은 길인지 잊을만하면 한번씩 스스로에게 되물어 보면서...

33인의 공통된 흐름은 이러하다 욕심과 집착을 털어내 곳에 마음자리가 있다는 것 이 세상 모든 것은 연결돼 있으며 자연과 나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것, 분별하지말고 상을 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부요한 환경보다는 춥고 배고플 때 공부가 더 잘된다는 것 공부는 젊은 시절에 해야한다는 것 끊임없이 하심해야 한다는 것 등이 그런 공통된 지혜였다

 '선' 이란 한마디로 말을 통해서 글을 통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배를 보는 것만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직접 한입 씹어 먹어보면 알듯이 선이란 그런 것이라고 숭산은 말을 한다

성수스님은 " 사서삼경으로 모자라고 팔만대장경으로 부족해서 나라가 망하는 게 아니며 정신을 모르고 살면 전부 죽는길" 이라며 " 자기 목을 뚝 떼어 나무에 걸어놓고 덤비는 용기와 기백으로 공부하라" 고했다

백수를 바라보는 고승스님은 " 일생은 눈 깜빡하면 지나가는 찰나간이요 호흡지간" 이라며 " 세월가면 늙고 버려야 할 몸뚱이보다는 늙지않고 죽지도 않는 마음을 궁구하라" 고 촉구한다  생활속에서 사려야 할 지혜도 많다. 무욕, 하심(下心), 무소유, 이웃에 대한 배려 고송스님은 인욕하면 장수한다고 했고
인허스님은 행자 생활을 통해 하심(下心)을 배웠다고 했다.
 고산스님은 '베풀면  마음이 즐거워진다'며 자비의 실천을 강조했고
지종스님은 '불법은 언행이 일치돼햐한다'며 실천의 중요성을 돼새긴다.
법흥스님은 '지옥과 천당은 내 마음에 달린 것이니 자작자수自作自收)'라고 했으며 동춘스님은 '스트레스도 집착에서 온다'고 했다


<< 동춘 스님 - 선악이 모두 불법(佛法)이요 나의 스승이라 중에서>>
  인연 따라 사는 것 이지요. 머무르면 집착이 생기고 얽매이게 됩니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인생인데 얽매일 필요가 있나요. 또한, 시비할 게 뭐 있나요. 세상에는 나를 흠 잡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도와주는 사람도 있잖아요.
다 인연일 뿐입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본래 악 없이는 선도 없고 선 없이는 악도 없지요.

  스트레스는 집착에서 오는 것이지요. 누가 내게 서운하게 하면 '내가 전생에 잘못한 빚을 갚는 것이다. 더 잘해 줘야겠다.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한다.
왜 일이 안 되나 생각해 보세요.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으니까요. 우연히 당하는 봉변도,  횡재를 하는 재운도 원인이 있습니다. 과거의 인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미래가 결정됩니다.

<< 청화 스님 - 생명의 본질 자리를 찾아서 중에서>>
출가 이후 하루에 점심 한끼만 먹는 일중식과 장좌불와를 실천하고 있는 청화스님은 육식에 대해서는 열가지 허물이 더 거론된다.
중생이 다 자기와 같은 동체인데 잡아먹는 것이 그렇고, 잡아먹히는 동물이 고기 먹는 사람을 싫어하는 것이 또 그렇다. 산중에서 고기를 먹지 않고 지내면 새들도 가까이 와서 지저귀고 친해지려 하지만, 고기를 먹는 사람은 짐승들이 두려워해 곁에 오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 이 대목은 나 어렸을 때 개장수가 집에 오면 키우던 개가 마루 밑에 숨어서 그가 사라질 동안 나오지 않던걸 여러차례 보았기에 더 공감이 되었다)
  그리고 오후에는 음식을 먹지 않는 중후불식(中後不食)이 원칙이다. 그러면 음심이 적어지고, 수행의 원수인 잠이 적어지며,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 쉽다. 또 적게 먹으면, 몸이 가뿐해지고 방귀도 없으며, 몸이 항상 안락하다.
 " 남의 눈에는 고통으로 보일지 모르나 내게는 가장 행복하고 편한 생활" 이라고 했다 참으로 해 보지  않고서는 알수 없는 경지다

이 책을 다시 읽는 몇날은 그야말로 나도 도를 닦는 기분으로 책을 한장 한장 넘겼다. 예전에 이 책을 대했을 때 소감과 동반되는 옛 기억도 되살리면서 다시 한번 지금의 나를 되돌아 보았다. 물론 스님들의 말씀을 다 이해한건 아니었다. 그걸 또 속세에 때묻혀 사는 내게는 더욱 그럤다. 하지만 그중에 주은 이삭 하나만으로 충분히 배부블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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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한글사랑(다향)
 생활불교 용어-★


삼매(三昧) 
삼매의 어원은 삼마지(三麻地 )다. 삼마지란 마음을 한곳에 둔다. 마음이 한곳에 집중되어 흐트러지지 않는 상태를 이른다. 일반적으로 수행을 통해 마음이 분산되지 않고 어지러운 생각들이 사라져 편안하고 고요해짐을 삼매라고 한다. 수행이 삼매의 단계에 이르면 올바른 지혜가 생겨 진리에 도달한다고 한다. 따라서 불교는 삼매를 중시한다. 부처님은 삼매를 통해 깨달음을 얻으셨다. 부처님의 설법은 삼매에 든 다음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 삼매의 상서로움을 엿 볼 수 있다.

장엄(莊嚴) 
규모가 크고 엄숙한 광경을 볼 때 " 장엄하다 "고 탄복한다. 또 의식이 웅장할 때 " 장엄하다 " 고 한다. 그러나 장엄(莊嚴)이란 불교의 극락세계를 표현할 때 쓰는 용어임을 아는 이는 드물다. 장엄이란 ' 좋고 아름다운 것으로 국토를 꾸미는 것' 을 말한다. 불교에서의 장엄은 단연 극락세계 아마타불의 국토이다.
 
이심전심(以心傳心)
마음과 마음으로 전한다고 할 때 " 이심전심 이지 " 라는 말을 쓴다. 말도 하지 않았는데 서로 뜻이 통할 때도 " 이심전심이야 " 라고 한다. 흔한 말로 ' 척하면 알았을 때 '도 ' 이심전심 ' 이라고 한다. 문자가 아닌 마음으로 전한다.
 
아수라장
 시끌벅적하거나 전란(戰亂)이나 투쟁으로 끔찍히 르트러진 현장을 " 아수라장 같다 " 또는 줄여서 " 수라장이 되었다 " 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아수라장 또는 수라장이란 아수라(阿修羅)의 심술이 만들어 내는 피해 젼장을 말한다. 아수라란 천(天),인(人), 아수라, 아귀(餓鬼), 축생(畜生), 지옥(地獄), 중의 하나를 말한다. 아수라는 화를 잘내고 도전적이어서 전신(戰神)이라고도 한다.

야단법석 
불교의 야단법석(野壇法席)은 사람들을 위해 야외에 법단을 차려놓고 하는 설법장을 말한다. 법당으로써 수용할 수 없는 숫자의 대중이면 자연 야단법석이 되어야 할 것이다. 불교가 최초로 법석을 편 것은 녹야원 에서 이다. 갠지스강과 바라나스강이 갈라지는 삼각지에 그림처럼 펼쳐있는 녹야원, 이곳에서 부처님은 법석을 펼쳤다. 불단(佛壇)은 나무등걸이 아니면 작은 바위였을 것이다. 그야말로 야외 자연 그대로의 법석이다.

면목(面目) 
우리가 생활속에서 자주 쓰고 있는 면목은 ' 체면 ' '남에게 드러낸 얼굴 ' 등으로 쓰인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전의 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을 알면 깨달음을 얻는다 ' 고 하여 모든 사람이 지니고 있는 깨끗하고 맑은 진수(眞髓)를 일컫는 말로 ' 불성(佛性)' 과 같이 쓰인다.
 
도구(道具) 
도구의 진의는 수행하는 스님이 불도를 닦기 위해 사용하는 기구를 말한다.
 
(뒷)바라지 
법주(法主)를 도와 의식을 진행하는 스님 ' 옥바라지 ' ' 음식바라지 ' 사용.
" 뒷바라지를 잘해야 일이 순순히 풀린다 " 고 한다. 땀흘려 얻어낸 성과나 큰 어려움의 극복에는 반드시 뒷바라지 한 배경이 있기 마련이다. 이렇게 흔히 쓰이는 바라지란 절에서 재를 올릴때 법주를 도와 결전을 독속하고 가영(歌詠)을 부르는 스님으로부터 어원이 생겼다.
 
무진장(無盡藏) 
'무진'과 '장'으로 합성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 무진이란 덕이 넓어서 무궁함을 뜻하고, 무진을 포함한 것을 장이라 한다. "
 
참회(懺悔) 
참(懺) - 죄 용서받기 위해 참음.
회(悔) - 부처님께 죄를 고백함.
 
탈락(脫落) 
불교가 말하는 탈라은 " 벗어버린다 "의 의미이다.

기별(記別) 
부처님이 제자들의 수행이 무르익었음을 인가해 줄 때 기별을 준다. 기별은 수기(授記)와 같은 말로 미래세에 부처가 될 것임을 확인시켜주는 일이다.
 
투기(投機) 
투기란 원래 좋은 의미를 지녔다. 불교에서 ' 투기했다 ' 고 할 때면 ' 기가 투합(投合)했다'라는 말의 변형이다. 스승으로부터 인가를 받는 것은 수도자의 최고 영예다.
 
다반사 (茶飯事)
다반사는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등의 흔히 생기는 일을 말한다. 다반사의 일을 '존경해서 드리는 마음' 으로 승화시킨 예가 차례(茶禮)다. 우리는 한 해가 시작되는 날에 조상의 얼 앞에 모여 경헌히 밥을 드리고 차를 올린다. 이를 차례라고 한다. 차례를 지낸다음 그 해의 서원과 각오를 서로 나눈다. 가을이 되어 풍년이 들면 감사한 마음으로 차를 다려 조상에 드린다. 그래서 추석이란 명절이 생겼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리란 범어로 길상존이라는 뜻이다. '마하수리'의 마하는 '크다'는 뜻이므로 마하수리는 대길상이다. '수수리'의 수는 '지극하다'의 뜻이다. '사바하'는 '원만'성취'의 뜻이다. 따라서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를 이어 해석하면 '길상존이시여 길상존이시여 지극한 길상존이시여 원만, 성취하소서'가 된다. 이렇게 세 번 외움으로써 임으로 짓는 업을 깨끗하게 한다는 진언이다. 입으로 짓는 업이라면 거짓말, 이간하는 말, 아첨하는 말, 남을 욕하는 말 등이 있다. 인가느이 모든 잘못은 입으로부터 전달되고 입으로부터 익혀진다. 따라서 모든 공덕의 시작을 입을 잘 다스리는 데서부터 시작한다는 천수경의 근본취지는 매우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출세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타남을 말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 땅에 오셨거나 미래에 마륵 부처님이 나올때를 출세라고 한다.
 
이판사판 
조선사찰에 이판승과 사판승의 구별이 있다. 이판이란 참선하고 경전을 당론하고 수행하고 홍법 포교하는 스님이다. 속칭 공부승이라고도 한다. 사판은 생산에 종사하고 절의 업무를 꾸려나가고 사무행정을 해나가는 스님들이다. 속칭 살림스이라고도 한다. 살림이란 절의 모든 사무와 재산관리를 통틀은 말이다. 이판과 사판은 그 어느 한 쪽이라도 없어서는 안되는 상호관계를 갖고 있다. 이판승이 없다면 부처님의 지혜광명이 이어질 수 없다. 사판승이 없다면 가람이 존속할 수 없다. 그런데 왜 이판사판은 '마지막'을 뜻하는 의미로 바뀌었을까? 조선이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국교로 세우면서 당시 스님이 된다는 것은 마지막 신분계층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시주. 보시 
시주란 본래 보시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 것이 근래에 와전되면서 '시주' 자체로서 '보시하다'라는 의미로 바뀌었다. 따라서 시주는 보시로 보아도 될듯하다.
 
건달(乾達) 
건달은 사람이 죽어서 다음 생을 받기까지의 기간에 해당하는 ' 중유(中有)의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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