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25. 10:54 가족과 함께

바램.

[여동생들에게 보낸 글]

얼마전 옷장에서 낡은 양복 하나를 보았다.
오빠가 본사로 자리를 옮긴다고 여동생들이 선물해 준 양복이었다.
본사 첫출근길이 그 옷으로 빛났다.

이젠 세월이 흘러 후줄그레 해졌지만
옷장에서 뿐만이 아니고
내 맘속에서도 늘 살아 숨쉬고
그 옷을 볼 때 마다 마음을 여미곤 했다.

정확히 18년이 지난 옛 이야기같지만,  내게는 옛 얘기가 아니라
남자 형제가 없어 때론 힘들고 외로움을 느낄 때 마다 늘 나를 나답게 만들어 주는 화수분 이었다.

이제 동생들에게 말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도 이게 올바른 결정인지 자신은 없다.

난 지금 신촌 세브란스 암병동에 한달 이상 머무르고 있다.  담낭암으로 수술은 어려워 항암치료를 받는데 생각보단 수월친 않구나.

 벌써 암병동 병실에서 한달을 훌쩍 넘기면서도 단 하나 양보할 수 없는 바램이 있다면
그건 내가 현재 암으로 투병중인 걸 어머니만큼은 모르시거나 이 세상 사람 중에 가장 늦게 아셨으면 하는 것이었다.

물론 영원히 감출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렇게나마 욕심을 내어보는 어리석은 아들이 되어보는 것이다.

사실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아시면
당신이 받으실 충격과 그로 인한  뒷감당을 이겨낼 자신이 내겐 없다.
물론 기우일 수도 있다.

그래서 부탁하나 하려고 한다.
당분간 내가 암투병중인 일은  동생들만 알고 어머니께는 절대 비밀로 했으면 한다.

어차피 감출 수 없는 사실이므로
어느 정도 항암치료가 진행되어 얼굴을 보여드려도 될 즈음 적당한 시기를 골라 자연스레 내가 말씀드릴까 한다.

늘 건강하기를 바란다.

병상에서 오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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