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쉬는 날이라 IPTV 로 조용한 영화를 고르다가 지난 2014년 부산영화제에서 인기를 끌었던 (2016년도에 정식 개봉)  '산이울다' 라는 제목의 중국 영화를 보게 되었다.  살짝 본 예고에서 펼쳐지는 타항산맥의 아름다운 그림 같은 풍경 속 산들을 보면서 점점 이 영화에 빠져들었다.

기구한 운명의 한 여인에게 찾아온 짧은 행복, 그리고 그녀가 차마 말하지 못하고 숨겨왔던 충격적인 진실에 관한 반전 이야기로 ...

영화의 서두에서 중국이라면 충분히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시골 오지와 범죄없는 마을이 주는 여러가지 혜택 그리고 중국 인민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공안 (예전 어르신들이 말하던 일본순사 이미지가 강하다. 요즘은 달라졌다지만 시골은 여전하다.)들에게 시달릴 걸 생각해 보면 실제로 실화같은 영화가 아닐까? 한다.(중국에서 실제 몇년 살아본 경험으로)

산이 울다 (喊·山, Mountain Cry)
영화  107 분, 래리 양 (Larry Yang) , 2014 (중국)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폐막작으로 상영되면서 우리나라에 먼저 소개가 되었고 2016년도 5월에 정식으로 개봉도 했었던 작품으로 홍시아역의 량예팅은 신인이라고 하는데 운명적으로 만나 순애보 같은 사랑을 한 남녀 주인공의 연기가 스토리 만큼이나 무척 인상적인 영화이다. 예전 문소리가 연기했던 정신 지체 연기와 정윤희의 벙어리 역할의 영화가 잠시 내게 머무르다 간다.
특히 한 때 우리 세대를 사로잡았던 인기 여배우 정윤희의 이미지와 살짝 겹쳐지는듯한 이 중국 여배우. 더군다나 벙어리 역할까지 비슷하니 내 세대만 잘 아는 정윤희 이미지가 영화보는 내내 함께 떠오른 영화이다.

 전설적 미녀배우 정윤희
산이 울다

중국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점의 하나인 좀 떨어지는 섬세함을 애써 색감이나 배경의 화려함으로 보완한 영화가 많은데 오랫만에 이 영화는 그런 중국영화 같지 않은 남다른 섬세함까지 갖춘영화 였다.

이 영화를 보면서 몇년 전 영화배우 이유영이 여주인공으로 나온 한국영화 "봄" 처럼 아름다운 한편의 수묵화를 감상하듯 담백하면서도 아름다운 영상미가 돋보였다. 두 영화 모두 서두부에서 아름다운 영상미를 서로 뽐내는듯 했다.

그리고 몇 가구 안되는 조그만 산속 마을이지만 사람 사는 세상은 어디나 다 똑같다는걸 느끼게 해주고 사람사는 곳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의미였다. 
사랑은 공부하듯 배우거나 찾는게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무언가에 부딪히듯 우연히 오고 그런 사랑에 대하여 남들이 자로 길이를 잴 수 없는 각자에 맞는 마음 속 깊음이 있다는 걸 영화의 말미 부분에 이르러 알게 해준다.

정윤희 처럼 벙어리가 갖는 서정적이고 절대적인 가슴 아픈 로맨스와 비슷하게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주인공 (벙어리여서 일까요? )에게 짠한 연민이 영화를 마치는 내내 사라지지 않았다.

가날프고 예쁜  여주인공 홍시아에게선 말을 못하는 장애를 통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말하지 못한 뭔가를 계속 상상하고 기대하게 만드는 힘과 함께, 남주인공 한총처럼 사랑해 주고 싶은 마음으로 영화 보는 즐거움을 더해 준다.

엄마 홍시아(량예팅),
예쁘죠!  신인다운 풋풋함까지...

영화 제목「산이 울다」에서 느끼듯 현재 진행형인 제목은 영화 이후에도 주인공들이 다시 만나서 더 이상 아픔과 슬픔없이, 행복한 삶을 살았기를 간절히 바라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현재진행형으로 표현한게 아닐까 합니다.

다르게 보면 산이 스스로 말할 수는 없으니 우리는 메아리를 통해서 산이 말을 한다고 믿고 있기에 '산이 울다'라는 영화 제목은 여주인공 홍시아가 말을 못하기 때문에 그녀를 대신해서 산이 울어주는 걸 표현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영화 도입부에서도 산에서 산으로 대화를 나누는게 보이기도 함니다.

영화의 배경을 보면 소박한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어느 두뫼 산골 마을이라 마을의 풍경처럼 전개되는 이야기 마저도 순수한 사랑일걸로 예상했는데 마치 현실처럼 꾸밈없이 보여주는 영화의 장면 하나하나는 이렇게 아름다운 배경과는 어울리지 않게 가슴 아프고 좀 충격적인 슬픈 내용이었습니다.

이 영화의 배경이되는 타이항 산들의 풍광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마치 그림같아서  ‘중국의  그랜드캐니언’이라는 별칭으로 관광객을 유혹하는 타이항 산맥에서 촬영된 이 작품은 겹겹이 싸인 여주인공의 감춰진 비밀을 따라가는 재미만큼 눈앞에 펼쳐진 절경을 감상하는 쾌감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중국 산시성의 산골 마을에서 촬영되었다는데, 중국의 개혁개방 이전의 서부 시골 마을의 아름다운 경치를 영상 속에 제대로 담아내고 있어서 매우 아름답지요.

하지만 영화의 끝자락에 다다르면, 영화의 문을 매혹적으로 열어주었던 그 능선에 아로새겨진 인간들의 가혹한 욕망으로 인해 그 풍경이 더 이상 아름답게 다가오지 않는 점은 좀 아쉽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슬픔이 배경음악처럼 흐르는 영화로 이런 분위기를 이어가기 때문에 군더더기 없이 연기자들이 감정을 절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영화 자체는 세련되어 보였습니다.

장르가 멜로인 데다가, 홍시아 역의 랑 유에팅도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인 미모와 연기를 선보여서, 젊은 과부 홍시아와 청년 한총이 사랑에 빠지게 되는 전개가 그리 어색하지는 않았는데,  다만 한총을 그렇게 좋다고 따라다녔던 부자 과부는 한총이 살인범으로 몰리자 바로 그에게 등을 돌렸고, 믿었던 아버지조차도 살인범을 받아줄 가문이 어디에 있겠냐며 한총을 정신에 문제가 있는 여성에게 장가를 보내려고 나섭니다. 그 와중에 한총이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막기 위해 홍시아가 개입하게 되고, 한총은 그러한 홍시아를 (감옥에도 보내지 않고, 자신의 못마땅한 결혼 계획도 막아준)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게 됩니다. 연애 당사자 중 한쪽이 말을 할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에, 영화는 말 대신 그들의 표정과 행동을 통해 둘 사이에 싹트는 애틋한 감정을 보여주는데 특히 시골 남성과 여성이 보여주는 순박함은 그러한 애틋함을 더해줍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자세히 보면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오해’와 ‘이해’의 과정을 반복하게 만듭니다. 그땐 잘 몰라 오해였는데 조금 지나면 그 이유를 알게되어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 상황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침을 준비하는 홍시아(량예팅)를 남편 라홍(여애뢰)이 침대로 끌어들이고. 거칠게 반항하는 홍시아와 라홍의 관계는 그 이후 라홍이 딸에게 장난을 치는 스스럼없는 태도 때문에 새침한 아내와 터프한 남편의 관계처럼 오해하게 만듭니다. (당연한 얘기인데...) 반면 산 건너편의 애인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애정공세를 퍼붓는 이웃 청년 한총(왕쯔이)은 철없고 무책임한 사내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정말 이렇게 깎아내릴 듯한 절벽 위에 지어진 마을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영화 속 산골 마을은 멀리서 비추는 사진으로 신비로운 풍경을 연출해 냅니다.그런데 영화내용은 완전히 다르죠. 벙어리 홍시아는 출신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부랑자 남편을 따라 마을에 들어와 빌어먹고 살고 있었고,  늘상 계속되는 남편의 폭력과 학대 속에 고통 받던 중, 남편이 우연히 오소리를 잡기 위한 덫에 걸려 폭발한 폭약에 한쪽 발을 잃게 되고, 제대로 된 의료 처방을 받지 못하여 결국 사망하게 됩니다. 이 와중에 오소리 덫을 설치했던 마을 청년 한총은 살인범으로 몰리게 되는데, 마을 주민들은 외지인에, 벙어리인 홍시아의 남편 때문에 마을이 살인범 마을로 몰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공안에 신고하지 않는 대신 한총에게 홍시아 모녀의 생계를 돌보도록 결정하게 됩니다. 우리 관점으로 보면 좀 황당하죠.
따라서 관객은 한총이 오소리를 잡기 위해 설치해놓은 덫 때문에 라홍이 다리를 잃어 죽게 되었을 때 한총의 부주의와 무책임을 나무라는 마을 사람들의 태도에 동조하게 됩니다. 졸지에 가장을 잃고 두 아이를 키워야 하는 어린 엄마의 모습과 그녀를 부양해야 한다는 마을 회의의 결과에 반항하는 한총의 태도는 그같은 ‘오해’를 더욱 부추기게 됩니다.

이 영화의 홍보 팜프렛. 첫장면을 보면 붉은 옷을 입고 산 봉우리에서 뭔가를 두드리며 알리려는 듯한 여주인공 홍시아(량예팅)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알고보면 이 장면은 아이러니하게도 남편의 죽음을 기뻐하는 무언의 몸짓이었습니다. 이 대목은 상당히 중요한 복선이 깔린 장면 입니다.

이런 ‘오해’로 인해 마을 주민들은 라홍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홍시아의 기이한(?) 태도를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는 젊은 과부의 슬픔에 젖은 모습으로 부주의하게 (오해로) 넘겨버립니다. 물론 이 오해의 진짜 근간은 이 산간 마을에서 완벽한 타자인 홍시아에 대한 무관심이지만, 홍시아는 남편이 죽자마자 슬퍼하기는 커녕 집 안을 샅샅이 뒤져 비누를 꺼내고 천연덕스럽게 머리를 감고 그녀는 장례식에서 남편의 관에 흙과 돌멩이를 던지며 발작하듯 오열합니다. 그 오열이 어떤 감정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살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어린 아내가 가장을 잃은 슬픔을 극렬하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제멋대로 판단한 마을 사람들은 그녀보다 더 서글프게 훌쩍거리기 시작한다. 마을 사람들의 흐느낌을 듣던 홍시아는 낄낄대며 웃지만(여기서 살짝 이상하다. 웬지 내가 뭔가 오해하고 있구나 라는 느낌이 옵니다) 그녀의 웃음은 슬픔에 겨운 광기 정도로 마을 사람들은 또 다시 ‘오해’ 합니다.

우리는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가 남편을 묻는 장면에서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게 아니라  '세상 사람들아~  나는 이제 자유다. 해방되었다' 라는 그런 기쁨의 표현이았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됩니다..

영화 서두에서 보여준 말을 못하는 벙어리 새댁인 그녀는 6개월전에 남편, 딸 그리고 젓먹이 갓난 아이와 함께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첩첩산중의 산골마을로 들어왔는데, 마을 사람들에게  거지 취급을 받고 남편으로부터는 미친년 취급을 받으면서도 악착같이 살았던 그녀였기에 그러한 행동에 왜? 라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영화는 바로 그녀의 '왜?'를 찾아가는 긴 여정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남편이 죽고 마을에서는 그 동안 범죄없는 마을로서의 특혜와 지위, 그리고 조사과정에서 공안에게 당할 일들을 피하기 위해서 살인을 신고하는 대신 오소리잡는 기구를 설치한 한총에게 당분간 이 세 모녀를 보살피게 하고 관련 서약서를  작성하게 되는데 홍시아가 이장을 대리하는 마을 대표의 주재하에 남편의 사망에 대한 보상금을 합의하는 장면 역시 ‘오해’로 연속됩니다. 마을 어른인 의사 선생은 그녀가 ‘말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제멋대로 ‘무지하다’로 해석해 버리고 라홍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보상을 원하지 않는다는 그녀의 태도 역시 무지 혹은 슬픔으로 인한 경황이 없는 것으로 해석되고,  그동안 무시해 왔던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쓰고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을사람들이 잠깐 놀라긴 했지만 그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그녀의 속 사정을 짐작하려는 노력으로는  이어지지 않습니다. 영화는 그녀가 마을 사람들이 상상하는 ‘거지(라홍)의 벙어리 아내’가 아닌 양갓집에서 곱게 자란 홍시아였음을 알려주면서 반전을 기대하게 합니다.

 바열한 남편 연기가 돋보인다.

 홍시아가 어린 소녀일 때 라홍에게 납치되었고, 홍시아는 라홍이 아내를 죽인 사실을 엿들었다는 이유로 그에게 혀를 잘려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소녀는 사내에게 납치 유괴되었고, 이후 강간당하며 두 아이를 낳았던 것이죠.

이제 우리는 영화의 첫 장면의 의미를 다시 읽어야만 하는데. 홍시아는 새침한 아내가 아니라 성폭행 피해자이자 여전히 감금 납치된 상태로 강간당하는 아내였기에 그녀에게 라홍의 죽음은 가장의 상실이 아니라 감금으로부터의 해방이자 자유였던 것이죠.

처음에는 의무로 시작되었던 한총의 부양은 점차 애정으로 변하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홍시아는 라홍의 죽음 이후 그에게 어떤 종류의 의무감을 부여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관계는 점차 자발적인 것이 되어가는데...
이러한 둘의 감정을 제일 먼저 정확하게 짚어준 것이 한총의 아버지로  그는  ‘현재’에서 나름의 지각과 양심을 갖춘 인물로 묘사되지만, 의사 선생과 나눈 대화를 통해 밝혀진 ‘과거’에 의하면 한총에게 그 누구보다 깊은 상처(어머니 폭행, 주정, 부재)를 준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 역시 현재 보이는 것과 감춰진 실제 모습은 다르다는 걸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 영화는 아름다운 풍광 속에 펼쳐지는 멜로드라마 같은 겉모습를 하고 있지만 실상은 반전에 반전을 잇는 일종의 범죄 드라마로. 그림 같은 풍경은 장르를 오인하게 만들어내다 양파같이 벗겨도 벗겨도 끝나지 않는 진실을 암시하는 상징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는 샹각이 듭니다.

영화 말미에 폭력을 일종의 정당방위로 옹호하는 애매한 결과로 이어져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결말의 반전은 관객이 목격했던 ‘현재’를 진실을 폭로하는 ‘과거’로 되돌려 놓습니다.

초반에 라홍이 죽어가던 장면에서 그가 손에 들고 있었던 아기사과 (딸이 라홍에게 구해달라 부탁한 것)는 ‘부성애’로 해석되었는데. 자신이 라홍의 살인범임을 자백하는 홍시아의 자술서를 통해 그것이 그녀의 치밀한 계획에 포함된 미끼였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그녀는 한총의 덫을 활용해 라홍을 제거하려 했고, 다리를 잃고 신음하던 라홍을 베개로 질식시킨 것이죠.

그런데 이 자백은 영화가 그때까지 폭력이라고 묘사했던 행위들을 일종의 정당방위처럼 옹호하는 애매한 결과로 이어집니다.  주민으로 등록되지도 않은 홍시아 일가 때문에 한총과 마을 전체가 공권력에 시달림을 받으리라는 공포에 질린 마을 주민들이 그녀를 쫓아내려 하며 보여준 집단적 ‘광기’. 그것이 절차적으로 옳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현실에서는 가장 옳은, 즉 최선의 선택인 것이죠. 나는 차라리 모두를 위해서라도 진실이 계속 은폐되는 편이 오히려 나았을 것도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답니다..

 이렇게 행복했기에...

사랑을 지키기 위해 진실을 폭로하는..
마지막 극적 반전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시종일관 목소리를 잃은 가련한 피해자로 나옵니다. 어쩌면 홍시아는 라홍에 의해 그리고 이 영화의 극적 반전을 위해 이중으로 애처로운 피해자로 덧입혀진  것 같기도 합니다. 현실에서 힘없는 사람들이 가난과 멸시로 이중적 피해를 입는모습 그대로이기에

개인적 생각으로 홍시아에 대해 말 못하는 벙어리이기에 듣지도 못하고 당연히 글도 모르는, 이름도 없는 무지랭이라고 단정짓는 그리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마을 사람들이 바로 우리 아니 나의 숨겨진 모습이 아닌가 하고 되돌아 보았습니다.
 
또한 이 영화는 홍시아와 한총(왕쯔이)과의 사랑을 표면에 내세우긴 했지만 말을 못하는 그녀를 대신해서 중국이라는(그것도 후천적으로, 폭력에 의해) 나라에 존재하는(?) 어두운 면을 들춰냄으로써 주인공처럼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아픔을 밝은 곳으로 끄집어내어 치유해주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하고  중국에서 실제 살았던 사람으로서 개인적으로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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