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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초상 ... 우애령 소설가

한글사랑(다향) 2015. 3. 31. 08:47

■  결혼의 초상

 

며칠 전 나이 든 조카가 결혼을 앞두고 약혼녀와 함께 집을 방문했다.

 나이가 사십이 다 되었고 재정적인 상태가 풍족한 것도 아니어서 결혼이 어렵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조카에게 갑자기 동갑내기 신부 후보가 나타난 것이다.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앞으로의 계획은 어떤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에 여자가 말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정말 마음이 따뜻한 분이세요.”

그동안 이런저런 일들을 많이 겪어 힘들어 보였던 조카의 얼굴도 흐뭇하고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입가에도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여자의 어떤 점에 마음이 끌렸느냐는 짓궂은 질문에 조카는 멋쩍어하면서도 자랑스러운 어조로 인상도 좋고 이해심 많고 솔직한 게 좋았다고 대답했다.

제주도에서 친지가 보내준 갈치를 굽고 미역국을 끓여 남편과 함께 네 사람이 저녁을 먹으면서
우리는 이야기꽃을 피웠다.

처음 만나는 사람 같지 않게 여자는 활달하면서도 안정되어 보였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대단한 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즐겁게 설명하는 모습에서 자부심이 엿보였다. 자기가 워낙 걷는 것을 좋아해서 만나면 주로 함께 걸어 다닌다고 했다.

건강에도 좋고 절약에도 좋다고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여자를 보며 남은 생을 함께 의지하고 살아갈 배우자로 참 좋은 사람을 만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 생활에서 일어나는 불행감을 호소하는 사람들은 그 원인이

상대방인 배우자에게 있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런 점을 고쳐주려고 별 노력을 다해 봤으나 소용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작게는 치약 짜는 버릇에서부터 거실에 양말 벗어 놓는 버릇 같은 것들이

죽고 사는 문제로까지 등장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결혼 생활을 불행하게 하는 첫걸음은 배우자의 특질을 바꾸어서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개조하려고 들 때 시작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옛날 우리나라 노인네들의 지혜는 이런 의미에서 높이 사줄 만하다.

“생긴 거 어디 안 간다. 들볶는다고 생긴 게 고쳐지냐?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는 거 아니야.
그저 서로 위하고 참고 살아야지.”

그러나 상대방이 바뀌지 않는 한 불행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우리나라의 이혼율은 지속적인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내가 비참한 건 다 남편 때문이에요. 진짜 사이코라니까요.”

“내가 행복하지 못한 건 아내를 잘못 만났기 때문이지요.”

살아가면서 무슨 문제가 생길 때마다 이렇게 그 원인이 배우자에게만 있다고 주장하는 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는 어렵다.

“모두 다 제 잘못이에요. 남편은 훌륭한 분인데다 제 불찰이에요.”

“내가 다 못나서 그래. 아내는 머리도 좋고 능력도 있는 사람인데….”

이처럼 문제의 원인이 내게만 있다고 지나치게 자책이나 자학을 하는 것도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부부에게는 누가 나쁜지를 가려내는 날카로움보다

두 사람 사이에 가로놓인 문제를 함께 풀어내려는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 토머스 해리스가 이야기하는 인간관의 네 가지 유형을 살펴보면

자신이나 배우자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미안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내가 다 부족해서 그래요.”

“나만 동서들보다 처지는 것 같아. 그래서 처갓집에 가기 싫어.”

우선 이렇게 자기를 부정하고 타인을 긍정하는 유형이 있다.

스스로를 능력 없다고 느끼며 우울해하고 소외감을 느끼고 배우자에게 의존하고

인정을 바라며 인간관계에 극히 소극적이 된다.

“나도 잘한 건 없지만 당신은 내게 잘해준 게 뭐 있어요?”

“그래, 내가 이해심이 없는지 몰라. 그렇지만 대체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이해심이 있는 줄 알아?”

이렇게 공격적으로 자기도 부정하고 타인도 부정하는 유형이 있다.

배우자를 쌀쌀하고 몰이해하다고 느끼며 내가 다 자격이 없으니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생을 무의미하게 느끼고 목숨이 붙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산다는 태도를 지니는 것이다.

“도대체 속은 좁아터져가지고 무슨 생각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있어야지.”

“애를 왜 그렇게 못살게 굴어요. 당신은 성격이 틀렸어요.”

이와 같이 자기는 긍정하지만 타인을 부정하는 유형도 있다.

자기 입장은 지키려 드나 배우자를 불신하고 나쁘게 보는 것이다.

나는 옳지만 본질적으로 상대방이 틀려먹었다는 태도에 대해

이쪽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이기 어려운 것은 개인이나 단체나

심지어 국가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야, 오늘 힘든 날이었지만 당신도 애 많이 썼지?”

“그래도 우리 둘 다 그 고비를 잘 넘긴 게 정말 대견해.”

이런 생각을 갖고 자기를 긍정하고 타인을 긍정하는 유형이 있다.

결혼 생활에서 가장 바람직한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과 배우자의 가치를 본질적으로 귀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결혼 생활을 유지하려면 약점을 덮고 장점을 높이 사서 나도 이만하면 괜찮은 사람이고 배우자도 그만하면 괜찮은 사람이라는 긍정적인 관점을 지니는 연습을 해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서로 의지하며 소박한 삶을 열심히 꾸려가겠다고 앞날의 계획을 이야기하는 조카와 약혼녀를 보면서 흐뭇했다.

자신과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편안하게 느껴져서였다.

밤이 깊어 차가 아직 없는 두 사람을 버스 타는 곳까지 남편과 전송하면서

정말 즐거운 저녁식사였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었다.

[우애령 / 소설가]